지난 2004년 말 교통안전공단 주관으로 항공 종사자(조종사, 관제사, 무선통신사)를 상대로 영어 평가 시험의 하나인 G-TELP를 치렀더니 조종사는 275명 중 114명(41.5%), 관제사는 85명 중 23명(27.1%)만 기준을 통과했다. 2005년에는 전체 응시자 434명 중 317명(73%)이 불합격했다. 하지만 조종사나 관제사들이 자격증 갱신 혹은 신규취득을 위해 보는 이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자격증을 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시험은 구색갖추기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6년 9월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2004년 9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한국 등 비(非)영어권 국가들에 대해 영어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항공 종사자들을 현업에서 배제해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조종사와 관제사들 전부가 영어시험을 치르고 일정 기준을 통과해야 하게 됐다.
매년 전체 항공 사고 중 15~25%가 '커뮤니케이션 문제' 때문에 일어나며 국제선의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많이 난다는 판단 아래 이같은 요구를 한 것이다. ICAO는 2008년 3월까지 시간을 주고 그 때까지 영어 능력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종사자들에게 국제선 업무를 볼 수 없도록 각 나라에 통보했다.
이후 이 요구에 따라 2006년 9월 외부 시험기관에 의뢰해 '항공영어구술능력'시험을 도입한 우리나라에서는 시한이었던 지난 3월까지 영어평가 대상자 3600여명 모두가 합격증을 딴 것으로 1일 나타났다. 그간 어떤 일이 있었길래 조종사와 관제사의 영어실력이 급상승한 것일까.
비결은 시험문제를 사전에 알려주는 것이었다. 종전과 같은 조종사나 관제사들의 영어 실력으로는 비행기를 띄울 수 없을 것으로 우려되자 항공안전본부는 당시 문제은행식 시험을 도입하면서 예상문제를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했다. 당초 이같은 시험방식에 대해 ICAO는 "영어실력을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냈으나 항공안전본부가 ICAO 측에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조종사, 관제사 대부분이 영어시험에 떨어져 항공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고 하소연해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험은 영어로 된 질문에 대답하는 듣기, 말하기 평가다. 토플이나 토익과 같은 일반 영어 시험과 달리 항공 분야 교신에 필요한 과정을 문제에 반영한다. 얼마나 유창하게 말하는가를 시험관이 듣고 판단, 1~6등급으로 평가하며 4~6등급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를 다 알려주고 시험을 봤는데도 응시자중 95% 가량이 4등급이 나와 안심할 수준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4등급은 100점 만점 기준에 65~79점을 받은 것으로, 3년 뒤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 영어능력시험이 도입되면서 아시아나항공은 자체적으로 부기장에서 기장으로 승격할 때 요구하던 토익 630점 이상 성적 증명을 폐지하기도 했다.
한 국내 항공사 조종사도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공중 트래픽(교통량)이 증가해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며 "이런 긴급 상황에서 관제탑과 영어로 실수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조종사는 많지 않다"고 전했다.
실제로 영어 때문에 조종사와 관제소 간 소통 과정에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ICAO는 특히 아시아나 남미계 조종사들이 영어 실력이 뒤떨어지는 탓에 항공 안전에 위협을 초래하는 해프닝이 자주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반면 항공사들은 "영어 때문에 항공기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정부가 ICAO 요청에 과잉대응했다고 불만스러워 하고 있다. 원래 이 제도는 북미 지역에 운행이 잦은 남미계 항공사 조종사들 때문에 만든 것이며, 일본이나 대만도 ICAO 요청에 따라 조종사 영어 능력을 평가하고 있지만 항공사 자체적으로 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만 외부 평가 기관에 맡기는 바람에 응시료로 1인당 9만6000원씩 '헛돈'을 지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 시험 비용으로 그동안 항공사들은 5억원 정도를 썼다.
전 건교부 항공 담당 간부는 "현행 시험방식은 사실 좀 쉽게 치러지는 경향이 있다"며 "아직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항공 사고는 한 번 일어나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영어 실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