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갈리아노(Galliano·48). 패션 하우스인 크리스챤 디올(Dior)을 이끄는 그를 사람들은 '천재'라고 부른다. 어떤 회화 작품보다 더 극적이고 화려한 선을 구현하는 그의 디자인에 사람들은 줄곧 경탄을 내뱉는다. 영국 디자인 뮤지엄 사이트는 존 갈리아노를 '당대를 이끄는 디자이너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로 압축했다.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작가 21인과 디올과의 만남'전에 등장한 존 갈리아노를 만났다. 디올 모델인 샤를리즈 테론과 함께 애프터 파티장에 나타난 그는 핏줄 속에 흐르는 스페인의 열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 본인이 직접 '그 나라에서 부수가 가장 많은 매체와 인터뷰하겠다'는 조건을 달아 인터뷰에 응했다. 한정된 시간 때문에 대부분은 이메일로 대신하긴 했지만, 작품에 대해 쏟는 열정만큼이나 꼼꼼히, 그리고 평소처럼 경쾌하게 답했다.
― 장 샤오강, 장 후안 등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21명이 디올 작품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을 전시했다. 이번 전시의 의미와 행사 장소를 중국으로 계획한 이유는.
"난 개인적으로 중국의 역동성, 중국의 발전 가능성을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지난 몇 번의 컬렉션에서도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르노 LVMH그룹 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결과, 아시아의 전통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가 중국이었다."
―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 한가지를 알려주고 그 이유를 알려달라.
"내가 발표한 작품 중에 가장 인상에 깊은 작품을 알려 달라는 질문만큼이나 어려운 질문이다. 그중 왕공신이라는 중국 설치 작가의 비디오 아트가 생각이 난다. 양쪽 스크린에 한쪽에는 디올 컬렉션 런웨이(runway) 모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맞은 편에서는 작가가 섭외한 배우들이 각자 디올의 컬렉션에 등장한 모델들의 모습을 따라하는 작품이었다. 우리 브랜드의 가치는 복제되거나 따라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작품이었는데, 무척 유쾌하고, 디올의 의미를 잘 나타내준 작품이었다."
― 당신의 쿠튀르 쇼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옷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화려한 조각품 같은 느낌. 다른 거대 하우스들의 쇼 역시 아름답지만 좀 더 격정적이고, 좀 더 과장적이고, 파격적이다. 한편으론 저런 옷을 과연 누가 입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신은 왜 그런 옷을 만드는가.
"모든 여성은 꿈을 먹고 산다. 꿈이 모두 현실화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패션에 대한 열정'을 지닌 여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의 오트 쿠튀르(haute-couture·최상의 맞춤 컬렉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재정적인 문제로 오직 몇몇 쿠튀르 하우스만이 이런 컬렉션을 지원하는데, 디올은 아주 소수의 진정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만드는 하우스다. 이를 통해 여성들의 꿈을 완성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 요즘 같은 불황에 쿠튀르 쇼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가 하는 비판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슨 소리. 디올이 오트 쿠튀르를 지원하는 소수의 패션 하우스 중에 하나인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오트 쿠튀르는 패션의 자양분이며 뿌리이다.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패션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투자와 노력은 어떠한 상황에도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긴 사각형 TV를 보는 것 역시 조금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 패션을 잘 모르는, 혹은 무관심하기까지 한 일반인들에게도 당신의 이름은 유명하다. 디올을 이끄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명성은 높지만, 동시에 고(故) 다이애나빈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카를라 브루니가 당신의 의상을 즐겨 입는 것으로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내가 디올에서 만든 첫 번째 의상은 다름 아닌 다이애나의 파티복이었다. 그녀는 나에게는 의미 있는 여인이었으며, 오랫동안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내게 진정으로 우아한 여성이었다. 마담 사라코지(카를라 브루니) 역시 진정한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가 모델을 할 때부터 우린 매우 친했다. 그녀는 나의 의상을 잘 이해하고 잘 소화하는 여성 중에 하나다."
― 당신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국가적 뿌리는 무척 많다. 지브롤터 출신 아버지, 스페인인 어머니, 자란 동네 영국, 본격적인 일을 하게 된 프랑스, 여행하면서 만나게 된 여러 나라. 각각의 나라가 당신에게 끼친 영향은?
"여행은 나의 디자인의 근원이다. 향낭이나 사탕주머니, 춤을 추는 아이들, 테이블보, 그림, 전통의상, 심지어는 작은 단추 하나에서도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파워가 숨겨져 있다. 컬렉션을 치를 수 있도록 만드는 아이디어의 원천은 이와 같은 여러 각국의 작은 아이템에서 시작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은 기타 요소들과 함께 혼합돼야 한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섭취해야 한다. 모든 국가와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와 자신의 커뮤니티에 계속 부속화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틀에 갇혀버리면 삶은 척박해지고 두려운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내가 갖고 있는 문화적 다양성과 여행은 나에게 모든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알려줬고, 결코 조화를 이룰 것 같지 않은 요소들을 조화롭게 하는 방법도 알려줬으며, 끊임없이 영감의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 프랑스 대형 하우스를 이끄는 첫 영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95년 지방시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됐을 때도 여러 가지 반응이었다. 이때의 논란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처음엔 그러한 보수적인 시각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패션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수적인 태도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가지게 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패션의 독보적인 국가이다. 그들의 정서와 사고방식 패션을 바라보는 심미안은 습득되거나 교육되기 힘든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 작품들이 그들의 우려를 잠식시키리란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출신 어머니는 당신에게 플라멩코 댄스를 가르쳐줬다고 했다. 집시 정신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의 재능에 끼친 영향은?
"우리 식구들은 자주 플라멩코 춤을 추었다. 마을 사람들과도 그리고 우리 가족들끼리도…. 그때 췄던 플라멩코는 클래식한 플라멩코가 아닌 무척 와일드한 플라멩코였는데, 플라멩코를 위한 치장을 할 때면 항상 한바탕 소동이 일곤 했다. 더욱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 위한 소동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추억 때문인지 내게 있어 의상은 의상을 뛰어넘어 하나의 연극적 요소와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관(壯觀·spectacular)'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해 준 것 같다."
― 당신은 그 천재성 때문인지, 출발부터 운이 좋았다는 느낌이다. 세인트마틴 졸업 작품인 'les incroyables'는 영국 유명 셀렉트 숍인 '브라운스(Browns)'에 모두 팔렸다. 또 당시 영국 보그 에디터였던 리즈 틸버리스(Liz Tilberis)가 당신의 컬렉션에 푹 빠져 있었고, 그 외에도 승승장구했다.
"무슈 디올의 천재성은 현대 패션사가 입증해 주고 있지만 그의 의상들 역시 당시엔 많은 논란이 되었던 의상들이다. 폴 포아레, 비오넷, 샤넬 모두 비난과 극찬을 받던 디자이너이다. 나 역시 처음엔 정신 나간 디자이너란 이야기까지 들었다. 하지만 결국엔 남들과 다른 창의력을 인정받지 않았는가? 패션의 본질은 창의력 아닌가?"
― 파리에서의 첫 출발 이외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겉으로 볼 땐 큰 위험 없이 승승장구한 것 같다. 자신에게도 인생의 고민이나 고통이 있었을 텐데. 언제가 가장 힘들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극복했는가.
"물론 겉으로 보기엔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모든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은 잉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단지 나뿐 아니라 모든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컬렉션마다 나에게는 힘든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컬렉션이 시작된 이후 무대 뒤(백스테이지)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행도 나에겐 좋은 회복제다."
― 패션의 한 획을 그은 디올을 이끈다는 건 디자이너의 꿈이자 큰 부담이었을 텐데. 30대 중반에 그런 대형 하우스를 이끈다는 게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의미했는가.
"많은 심적 부담을 동반하는 건 당연했지. 하지만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꿀 만 하지 않은가? 나 자신의 꿈을 믿고 능력을 믿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디올이 가지고 있는 유산 또한 몹시 탐나는 일이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001년 여왕 생일날 CBE(대영 제국 훈장)를 수여받았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웠다. 버킹검 궁전에 초대받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직접 알현했다. 궁에선 '헬로 돌리(Hello dolly)'란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모닝 슈트를 차려 입고, 화려하고 위엄 있는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냈다. 정말 '영국적'인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디올을 이끄는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독특했고, 영국인 모두 이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거라 생각한다."
― 무엇이 디자이너를 진정 디자이너답게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를 꿈꾸지만 그들이 모두 인정받는 건 아니다.
"창조성이다. 오늘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창조성'인 것 같다. 디자이너에게도 한계가 있기에 많은 곳에서 자신의 디자인의 영감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도 주변의 모든 것에 영감을 받는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패션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자이너 자신만의 해석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디자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패션은 절대 즐겁고 화려하기만 한 일이 아니다. 끊임없는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의 반복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소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디자이너가 되는 것을 포기하란 이야기를 하고 싶다."
― 가장 디올다운 스타일은?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인가?
"오늘날 럭셔리란 항상 나 자신으로 남아 있는 걸 의미한다. 옷을 입는 방식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늘 앞서 연마하면서 스스로에게 당당해지는 걸 말하는 것 같다.
입은 옷차림 또한 그 사람을 대변해주는 방식이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당당한 여성이 아름다운 시대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당신의 이름을 딴 '존 갈리아노'란 브랜드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디올이 당신에게 그리고 또 존 갈리아노란 브랜드가 당신 스스로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존 갈리아노는 바로 나 자신이다. 1984년부터 시작한 존 갈리나오는 내 존재의 근원을 말해주는 것이다. 두 브랜드를 이끌면서 난 1년에 컬렉션만 19회를 치른다. 내 스스로를 각각의 브랜드와 따로 떼어 낼 수 없지만, 특히 디올에 있어서는 난 무슈 디올의 정신과 꿈과 살아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고심하고 있다. 갈리아노에서 난 내 자신의 씨를 뿌렸고, 내 스스로의 법칙을 세웠다면 디올에서 디올의 정원을 가꾸고 이전 못지 않게 매우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고 생각한다."
― 2009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꼭 사야 할 5가지를 고른다면?
"새로운 사바나 시크 핸드백, 힐, 와이드 벨트, 꼭 맞는 재킷과 속이 비치는 짧은 스커트이다. 꿈을 꿔라 그리고 그 꿈을 디올에서 실현하라!"
―어렵겠지만, 당신을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무척이나 어렵군!(웃음) 내 생각에 난 몽상가이자 해적 혹은 여행가, 삶에 대한 모험가…. 난 미를 창조하는 탐색가이자 내 뮤즈들과 함께 진화하고 그들에게 미의 권한을 부여할 능력이 되는 개척자이다."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1960년 지브롤터 출생
-1984년 영국 세인트 마틴 디자인 스쿨 1등 졸업
-1984년 런던에 개인 부티크 오픈
-1987년, 94년, 95년, 97년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 수상
-1990년 파리 기성복 컬렉션 데뷔
-1995년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
-1997년 크리스챤 디올 수석 디자이너
-2001년 대영제국훈장(CBE)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