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이후 일본군은 두 달 더 전주에 주둔했다. 미군 2명이 지프를 타고 처음 전주에 들어온 게 1945년 9월 13일이었으나, 기독교 선교터를 둘러본 게 전부였다. 부대가 들어온 것은 그해 10월 5일부터였다.
미군은 일본군이 떠난 옛 전주여중과 북중·사범학교·신흥학교에 천막을 쳤다. 주민들은 밤낮없이 철조망 안을 들여다보며 특이한 병영생활과 풍부한 물자에 놀랐다. 병영 밖으로 흘러나온 캔디와 '레이숀' 상자, 소형 라디오 등은 신기하고 외경스럽기까지 했다. 전주에 처음 등장한 불도저가 오목대 옆 산등성이를 밀고 순식간에 길을 냈다. '오하요'가 떠난 곳엔 '헬로' '기브비' '땡큐' 등 토막영어가 난무했다.
무질서와 치안부재 속에 봇짐을 싸 떠난 일본인 상점은 한국인 점원들이 인수해 이어갔다. 미군정청은 도정을 미군 중령 지사와 한국인 지사에게 함께 맡겼으나, 좌·우익의 대립은 시위와 파업, 테러, 폭동, 경찰서 습격으로 이어졌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좌익은 지리산에 들어가 유격대가 됐고, 남원에서의 군경 토벌대 소탕전은 6·25까지 이어졌다.
전주문화재단이 '전주의 8·15 해방과 6·25전 쟁'을 출간했다. 작년 10월 펴낸 '일제식민시대 구술실록'에 이은 '전주 근대생활 100년'의 속편이다. 격동했던 전주의 현대사를 70~90대 노년 86명이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좌익 집단 학살로 시작된 6·25와 3개월간의 공산 치하는 패퇴하는 인민군의 우익 집단 학살로 끝맺는다. 학살에서 살아남거나 현장을 목도한 이들은 피 냄새로 진동했던 참상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낸다.
해방은 무질서 속에 환희를 가져왔고, 문화예술에 새로운 기운을 감돌게 했다. 휴전 후 피난 왔던 배우와 감독들은 전주에 한국의 할리우드를 만들었다. 식량부족과 생활고에 허덕였지만 예술인들은 다방에서 꿈과 이상을 토로하며 그들만의 풍속도를 그려냈다.
'자유부인'의 물결은 전주에도 춤바람을 불러왔다. 백양 메리야스와 닭표 성냥이 창업을 하고 문화연필은 아이들 사이 CM송까지 애송된 선망의 학용품이었다. 50년대 중반 평화가 오면서 사회는 다시 비리와 부패로 빠져들었다.
이번 구술실록도 전편처럼 구어체로 문장을 이어가며 현장감과 흥미를 더한다. 재단 이사장인 장명수 전 전북대 총장이 펜과 녹음기를 들고 어렵게 증언자를 찾아나서 2년여 만에 완성했다. 한 시대의 입회자들이 세상을 뜨기 전 당대의 증언을 채록하고자 했으나 1차 구술만 마치고 세상을 떠난 이도 있었다.
장 이사장은 "도시문화형성사 전공자로서 꼭 하고 싶은 일이었고, 많은 분들이 마음을 열어줘 과업을 끝낼 수 있었다"며 "좌절과 고난으로 얼룩진 개인사들이지만 모으니 감동의 서사시가 됐고, 전주의 사회사 자료로 활용된다면 영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