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법령 중 아직 고쳐지지 않은 것들이 44건이나 된다는 사실에 법률 전문가들은 대부분 "국회의 직무 태만"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국회 관계자들은 "위헌 조항은 바로 효력을 상실하므로 고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고, 헌법 불합치 조항도 정해진 기간 안에만 고치면 되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은 "위헌 조항은 법 체제 정비 차원에서, 헌법 불합치 조항은 국민 권익 보호차원에서 가능한 한 빨리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 안 고쳐지나
16일 헌재에 따르면, 국회가 헌재의 위헌 결정을 받고서도 고치지 않고 있는 법령은 23개, 헌법 불합치 및 입법촉구 결정을 받고도 그대로 둔 것이 21개 조항이다.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는 "특히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 조항은 기간 도래 여부와 상관없이 조속히 고치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국회의 직무 유기"라고 했다. 헌법 불합치의 경우 위헌인 법률의 효력을 갑자기 정지시킬 경우 생길 수 있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을 언제까지 개정하라고 유예를 해 준 것으로, 법이 개정될 때까지는 효력이 지속돼 국민들의 불이익이 계속되는 만큼 최대한 빨리 개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국회가 정쟁(政爭) 같은 데 빠져 법안 개정에 소홀한 것 같다"며 "자기들이 만든 법(국회법)도 어기는 사람들이 남이 고치란 걸 고치겠냐"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시민과 함께 하는 변호사들'(시변) 이헌 사무총장은 16일 "국회의원들이 법을 우습게 보는 반(反)법치적 사고가 문제"라고 했다.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도 이날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 많은 법안들이 다름아닌 우리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만든 법안이라는 데 자괴감을 느낀다"며 "정치인들이 헌법 정신을 너무 무감각하게 자주 훼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미개정 법령, 무엇이 문제인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헌 법령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헌법 불합치 조항이다.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동시에 갖고 있어도 병원은 1개 밖에 세울 수 없게 한 의료법 조항도 1년 가까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공무원이 직무와 상관없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퇴직연금·수당의 일부를 감액하도록 한 공무원연금법은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고도 1년 반이 넘도록 계속 적용되고 있다. 의료법 중에는 태아의 성(性)감별 금지를 규정한 조항도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그대로다. 또 실수로 불을 내 이웃에 피해를 준 경우 중대한 과실이 있어야만 배상하도록 한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은 작년 8월 법 전체가 위헌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이달 12일에야 이 법의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재외국민 참정권 조항이다. 헌재는 작년 6월 재외국민에게는 국민투표권과 대통령·국회의원 선거권을 주지 않도록 돼 있는 공직선거법과 국민투표법, 주민투표법 조항에 대해 무더기로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헌재는 올 연말까지 법을 개정하라고 결정문에 명시했지만 가능할 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