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출장을 막 다녀온 친구를 만났다. 수다가 그리웠던 친구는 중국 현대미술의 이모저모에 대해 한바탕 늘어놓더니, 결론 삼아 이렇게 덧붙였다. "변화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곳이야. 예술도 변화에 대한 반응이 제각각이었어."
친구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중국을 배경으로 쓴 펄 벅의 소설〈동풍, 서풍〉(1929)이 생각났다. 이미 근대화의 바람이 일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여주인공은 여전히 부모님 시절의 전족(纏足)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녀의 남편은 그 모습을 외지인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난 당신이 붕대를 풀었으면 해. 네 발 뼈가 얼마나 뒤틀어져 있는지 봐. 전혀 예쁘지 않아." 남편의 말에 여자가 되물었다. "예쁘지 않다고요?"
여자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걸을 수 없을 만큼 발이 아파서 울 때면 그녀의 엄마는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렴, 훗날 널 사랑하는 이가 네 작은 발에 존경을 표하며 입 맞추어 줄 거야." 하지만 남편은 분명히 말했다. 예쁘지 않다고. 이제까지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에 따라 늘 변화한다. 그러니 먼 훗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노력하고 준비해둘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허무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미의 기준이 변한다는 것은 미가 곧 삶의 맥락에 연루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역사, 일상과 환경, 심지어는 생태까지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예술적 조건이 된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변하지만 결코 소멸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