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기자가 2주 동안 IMF 때 해고됐다 복직한 근로자 몇 명을 추적했습니다. 어렵사리 만남이 성사됐는데 약속장소에 가보니 한 명만 나왔다고 합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아쉽지만 소득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경제가 안 좋을 때 살아남는 법'이라는 귀중한 증언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해고 전과 복직 후 달라진 것으로 술자리를 안 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끼리 모이면 회사에 대한 불만이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지요.
▶대신 그는 부업(副業)을 하든 공부를 하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반드시 확보했다지요. 어려울 때 기댈 곳이 가족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계부(家計簿)도 쓴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내와 함께요. 꼼꼼히 나가는 돈을 계산해보면 절대 낭비를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게 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얻은 생존의 내성(耐性)이겠지요. 아마 다시 어려움을 맞아도 곧 헤쳐나갈 힘이 될 겁니다.
▶시절이 그래서인지 대기업 임원을 그만두고 직원 4명으로 사업하는 선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학원 가겠다던 대학 졸업반 아들이 갑자기 "취직하겠다"는 말을 했다는군요.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얼마 뒤 물어보니 흰머리 난 아버지가 불쌍해 보여 자기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다시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쓰고 있던 안경이 잠시 뽀얗게 변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우울해지지요. 왜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이렇게 변해가는 걸까요. 어릴 때는 없어도 해맑았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는데…. 예전에는 머리 뒷부분에 고사리 손으로 금을 그으며 "아빠 이만큼 빠졌어!"라고 하던 아이들이 며칠 전에는 "빠진 데는 그대론데 하얘졌어"라고 하네요. 잠시 우울하다가 그런 아이들의 재잘거림이라도 들을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느꼈습니다. 종착역을 향해 가는 기차 같지만 그 아이들이 다시 달릴 테니까요.
▶정신없이 살다 문득 고개 들어 창 밖을 보니 어느덧 만추(晩秋)입니다. 예전에는 낙엽 주워 책갈피에 넣어 말리고 아이들 데리고 단풍구경도 가고 했건만 세상 변하는 것 모르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러다 또 어느 날 고개 들어 창 밖을 보면 첫눈이 내릴지도 모르지요. 아! 정말 예전에는 영화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음악 몇 곡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와도 한없이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