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주위 눈길과 서먹한 대인관계, 그리고 애끓는 향수병…. 물설고 낯선 이곳에 시집왔을 무렵, 이국에서 누군가를 가르칠 거라 생각진 못했을 테다. 그랬던 '결혼 이민 여성'들이 이제 시부모나 자식뻘되는 토박이들에게 모국어와 고유 전통을 가르쳐, 우리 사회 다(多)문화적 토양을 살찌우는 교사로 활동 중이다. 부적응과 소외감을 떨치고, 사회에 참여해 뿌듯함을 누리는 이들의 얘기를 들었다. 주민들의 호응 속에 진행 중인 송파구의 '원어민 외국어 교육'과 구로구청이 운영하는 '아시아 다문화 교육 프로그램' 모습이다.
◆"주류 영어 따로 있나요?"
"이 스테이플러(stapler)는 종잇장을 묶는 데 쓰지요?" "선생님, 그건 호치키스(Hotchkiss) 아니에요?" 잠실4동 주민센터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필리핀 출신 하이즐 록산 로렌조(35)씨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면서 "영어엔 한국식 통용어가 따로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아 우리말이 꽤 유창한 그녀는 성인반과 유치·초등반 2개 강의를 맡고 있다. "영어에 능한 은퇴한 대학교수부터 '설명할 때 한국어를 많이 섞어 달라'는 초보까지, 수준 차이가 커서 애를 먹지만 모두가 열심이에요.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좋을 만한 알록달록한 교재를 나름대로 준비해 가지만 그 일도 쉽지 않네요."
록산씨는 국내에서 학원과 개인 영어강사로 2년간 일해봤다고 했다. 9세·4세 된 남매를 둔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이 '울 엄마가 동네 영어 선생님이다'며 으쓱해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북미·백인 영어는 주류 영어, 동남아 영어는 비주류인 양 받아들여지는 사정을 알기에, "더욱 열심히 하고 기회 닿을 때까지 가르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록산씨를 포함해 원어민 강사 3명이 주민자치센터에서 가르치고 있다. 송파구청은 필리핀·일본·중국·몽골·미얀마 출신 여성 12명을 원어민 강사 요원으로 선발했고, 지난달부터 외국어 교수법을 진행해 이들에게 '교사 수업'을 하면서 록산씨와 판초 리메디오스 아카윌리(36·필리핀), 요코야마 미카(40·일본)씨 등 3명을 우선 강단에 투입했다. 결혼 12년 된 3남매 엄마 요코야마씨는 "한국에 시집와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사실에 친정 엄마가 무척 자랑스러워한다"고 했고, 결혼 3년에 아들(4) 하나를 둔 리메디오스씨는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 '배구선수'처럼 모르는 단어가 많다"고 했다.
강사는 강사료를 받아 가계에 보탬이 되고, 수강생은 싼 수강료(3개월 수강료 1만5000원) 덕을 보기 때문에 수강 신청 열기는 계속 높아졌다. 송파구는 "원어민 외국어 프로그램 강좌를 늘리고, 1000명에 이르는 관내 결혼이민 여성에게 도움을 주면서 이들이 보람을 갖고 일할 다문화가족 프로그램을 다양화하겠다"고 말했다.
◆전통의상 입고 동요 가르쳐
구로구 지역 어린이집에선 베트남·중국·몽골·일본·필리핀 출신 여성들이 고유 의상을 입고 강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9월부터 시작한 아이들 대상 문화 교육 프로그램이다.
구로구는 화원종합사회복지관과 함께 한국과 고국 양쪽 문화·언어에 모두 능통한 5개국 강사들을 뽑아 프로그램을 짜고 전통 의상과 고유 악기·동요·놀이문화·음식을 준비시켜 개봉3동 광진선교어린이집, 개봉1동 만나어린이집 등 관내 어린이집에서 순회 강연을 진행 중이다. 조호연 구로구 디지털홍보과 주임은 "애초 계획은 연말까지 16개 어린이집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는데, 요청하는 곳이 많아 이달 말까지 26개 어린이집을 돌게 됐다"고 말했다.
구로구엔 한국계 중국인 2만5957명을 포함해 중국·미국·일본·필리핀 등에서 온 등록 외국인 수가 2만8448명이나 된다. 구 관계자는 "다문화 가정이 많은 지역 특성에 맞춰 어릴 적부터 다양한 문화를 소화 흡수할 능력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며 "강사들이 보수 없는 '자원봉사'로 일하면서도 열의를 갖고 자국 문화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구로구는 올해 성과를 평가해 다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조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