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3일 첫 라디오 연설에서 세계 금융위기 속의 한국 경제에 대해 "세계 경제가 긴밀하게 얽혀 있어 우리만 독야청청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우리도 내년까지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대통령은 작은 회사의 수위로 일했던 자신의 부친이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어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졌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한 개 중소기업이라도 무너지면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와 가족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워지는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또 "석유파동 때 멀쩡한 기업들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구하지 못해 고리(高利)의 사채(私債)로 연명하고, 그나마 돈을 구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많이 봤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대통령이 어렸을 때 겪었던 것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우리 기업 특히 건설업체를 비롯한 몇몇 업종은 30년 전 석유파동 때와 같이 금융기관들이 돈줄을 죄는 바람에 사채시장으로 내몰려 벼랑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금 어렵긴 하지만 IMF 외환위기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외환보유고가 2400억 달러 수준으로 1997년 말보다 27배나 많고, 기업과 금융기관 체질이 튼튼해졌고,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경험과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신뢰'를 들었다. "정부부터 신중하게 대처하고 국민에게 사실 그대로 모든 것을 투명하게 알리겠다"며 기업, 금융기관, 정치권, 국민 모두가 서로 믿고 각자 역할을 충실히 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업은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금융기관은 멀쩡한 기업들이 '흑자 도산'하지 않도록 지원하고, 정치권은 경제 살리기에 필요한 600여 개 법안을 조속히 처리해 달라고 했다. 국민에게는 에너지를 10%만 절약해도 올해 원유 수입액 1100억 달러의 10분의 1이 줄어들게 돼 경상수지 적자 100억 달러를 국민의 노력으로 메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이와 함께 해외소비를 줄이고 국내소비를 늘려 달라고도 호소했다.
대통령 말대로 지금 우리 경제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신뢰'다. 그중에서도 정부의 말과 행동에 대한 시장과 국민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정부가 국내외 금융시장과 실물경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고, 비상사태에 신속 과감하게 대처할 준비와 수단을 마련해 놓고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그래야 금융시장에서 돈이 돌고 그래야 흑자 도산도 막게 되고 기업 투자도 가능해진다. 근거도 없이 무조건 "괜찮다"고만 해서는 안 되지만 문제를 풀 수 있는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현실만 드러내는 일도 없어야 한다.
지난주 중반 한때 원·달러 환율이 1485원까지 치솟으며 외환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져든 것은 무엇보다 정부가 이런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이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춰 정보를 공유하면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의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시장에 맡겨서는 풀기 어렵다. 각국 정부가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 적극 나서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미국과 유럽 각국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IMF·세계은행 총회와 G7, G20 회담에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 노력이 이뤄지고 있고, 유로화를 쓰는 유럽 15개국도 긴급 정상회의를 열어 공동 대응책에 합의했다. 은행 간 신규 대출을 정부가 보증해주고 자본이 부족한 은행에 대해서는 정부가 공적 자금으로 은행 지분을 사들여 자본을 늘려주기로 하는 등 전례(前例) 없이 파격적인 대책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런 세계 차원의 공동 대처와 일부 우리 기업들이 보유 달러를 시장에 푼 덕분에 원·달러 환율이 이날 하루 71원 내려 1238원으로 떨어지고, 주가는 47포인트 오르며 국내 금융시장도 모처럼 한숨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적 경기침체를 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앞으로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그 물결이 국내로 밀려오는 일이 몇 차례 되풀이 될 것이다. 우리 국민과 기업, 금융기관들은 이런 세계 경제의 파도 위에서 작은 일에 화들짝 놀라 과민 반응하는 것을 피하면서 한국 경제의 중심을 잡아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