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들이 자크라니(가지런히) 이쁘게 나야 허는디 종자가 멀뚱멀뚱 그대로 있어라.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싹 틀 생각을 안 허니 미치겠지요."

멀리 남해가 내다보이는 구릉의 쪽파밭에서 김근열(47)씨가 파종용으로 뚫어놓은 비닐 구멍 사이로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흙을 뒤적이며 말했다. 2000㎡ 남짓한 그의 밭에서 푸른 쪽파 싹이 솟은 비닐 구멍은 열에 대여섯. 종자를 뿌린 지 한 달이나 지났지만 그 사이 제대로 된 빗줄기 한번 비치지 않은 지독한 가뭄 탓에 싹도 틔우지 못한 것이다. 물을 끌어대려고 밭 한가운데 스프링클러를 설치해두었으나, 스프링클러에 연결된 호스의 끝은 바짝 말라붙은 농수로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지난 1일 둘러본 전남 최대 쪽파 산지인 보성군 회천면 일대 쪽파밭은 김씨의 밭과 대체로 사정이 비슷했다. 예년 같으면 초록 물결을 이뤘어야 할 쪽파밭이 가뭄으로 싹을 틔우지 못하면서 군데군데 흉터가 진 것처럼 허연 흙이 드러나 있었다.

기상청이 발표한 지난달 전국의 평균 강수량은 63㎜로 11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기온은 평년보다 섭씨 1.3도 더 올라가 '뜨겁고 메마른 가을'이다.

남부 지방의 가뭄은 특히 심하다. 경상남도는 9월 이후 평년의 5분의1 수준인 33㎜밖에 비가 오지 않아, 남해·함양·산청·거창 등 9개 시·군 118개 마을의 1만2000가구 3만여명이 제한급수나 운반급수를 받고 있다. 전남에서도 신안군의 2000가구와 구례군의 마을상수도 일부가 제한급수 중이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은 가뭄이 심해 가로수 잎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지난달 25일에 0.9㎜쯤 내린 비가 마지막으로, 10월에는 단 하루도 비가 오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콩을 재배하는 양순식(36)씨는 "콩깍지 100개 중에 30여개는 알맹이가 들지도 못한 채 햇볕에 타버렸다"고 말했다. 구례군 친환경농정과 관계자는 "포도나 단감의 과실이 맺혔다가 말라서 떨어지거나 충분히 자라기 전에 익어버리는 피해를 본 농가도 있다"고 말했다.

메마르고 뜨거운 가을은 파·콩뿐만 아니라 고추 작황에도 피해를 입히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채소관측팀 관계자는 "지역마다 작황이 다르지만 파와 고추가 가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고추 생산량이 10%쯤 감소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8월 하순 파종한 김장용 무와 배추, 9월 하순부터 파종한 양파나 마늘 농가도 지독한 가뭄 속에서 인공적으로 밭에 물을 끌어대느라 초비상이다. 하지만 저수지도 말라가고 있다. 전남 지역 3229개 저수지의 저수율은 56%에 불과하고, 경남 지역 3222개 농업용 저수지의 저수율은 30.8%로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밭 작물들과 달리 이미 수확기를 맞은 일부 작물 중에는 가뭄 덕을 본 것도 있다. 배는 올 여름 큰 태풍 피해가 없어서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여름 배추와 무의 생산량도 지난해보다 10% 가량 늘어났다. 벼도 8월 말부터는 물이 별로 필요하지 않고, 일조량이 풍부해야 수확이 좋기 때문에 큰 풍작이 예상된다.

하지만 농가 입장에서는 이런 풍작이 반갑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예년보다 이른 추석으로 과일 등의 소비 대목은 지나가 버렸는데, 생산량은 늘어서 가격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배의 경우 '신고'종 상품의 도매가가 평년 이맘때는 15㎏에 2만7883원이었는데 올해는 9일 기준으로 1만8600원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농림수산식품부가 비상대책으로 배 1만t 가량을 사들여 폐기하는 대책까지 강구하고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