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식 정치부 차장

미국 공화당의 연방 하원의원들은 대단한 강심장의 소유자들이다. 여당 소속인 공화당 의원 과반수가 부시 행정부의 7000억 달러 구제금융 법안에 끝까지 반대했다. 한 차례 부결 소동을 거친 끝에 가까스로 의회를 통과할 때도 표결에 참석한 공화당 의원의 54.2%인 108명이 반대 표를 던졌다. 야당인 민주당의 찬성이 없었다면 또 한 번 부결될 수도 있었다.

"구제금융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경제 재앙이 닥친다", "부결되면 미국 경제는 사라진다"는 대통령과 경제 각료들의 무시무시한 경고와 각종 설득도 이들에겐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정(黨·政) 분리의 원칙이 확고한 미국이라고는 하지만,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 상황에서 여당 의원들이 이번처럼 집단적으로 반기를 든 것은 드문 일이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월 스트리트의 부자들을 국민 세금으로 구제하려는 것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를 의식한 측면도 있고, 이 방안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회의(懷疑)도 깔려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대의 이유로 정치 철학과 원칙의 문제를 들고 있다. '작은 정부'와 감세(減稅)라는 현대 미국 보수진영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와 레이건 대통령 등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정치 이념이자, 가장 성공을 거둔 대표 브랜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대단하다. "정부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라는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사는 지금도 고전(古典)처럼 인용되곤 한다. 그런 공화당 의원들에게 국가의 대규모 개입을 뜻하는 구제금융에 찬성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나 다름없는 일인 셈이다. 거꾸로 이들은 구제금융을 진두지휘하는 폴슨 미국 재무장관과 버냉키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금껏 믿어온 가치와 사고(思考)의 틀(패러다임)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은 불안과 저항을 부르기 마련이다. 미국발(發) 패러다임의 위기는 미국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미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 내 일부 성급한 학자들은 벌써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을 언급할 정도다. 냉전 종식 후 지난 20년 가까이 유지된 유일 수퍼 파워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의문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일고 있는 거대한 풍랑의 결말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 폭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불확실성은 증폭될 것이고, 그만큼 혼돈과 불안의 시간을 보낼 것이란 점이다. 우리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패러다임의 위기에 노출돼 있다. 반세기 이상 국가 발전 전략을 미국과의 연대 속에서 추구해 온 우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국내 좌파 일각에서 나오는 "미국식 모델의 수명이 다했다"는 식의 주장은 무책임하고 성급하다. 오히려 지금은 새롭게 닥친 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지혜를 모을 때이다.

문제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명박 정부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위기 대응을 보여주지 못하고, 하루 하루 환율을 놓고 전전긍긍하는 듯한 모습은 곤란하다. 정부가 오히려 화(禍)를 키운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해도(海圖) 없이 풍랑 속으로 뛰어들어 놓고서는 "내가 길을 안다"고 고집부리는 항해사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신뢰할 만한 최고의 팀을 짜 정부의 위기 대응에 대한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