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님과 만나기로 한 약속의 그날. 어찌하여 미련하게 과음 과식을 하였단 말이냐! 아이구 배야!" 남자의 신음 뒤에 멘트가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 활명수가 있는 것이었으니, 시원하고도 뒤가 깨끗하구나. 아, 잊으랴 잊을소냐 활명수!"
1969년 '국민 소화제'로 불리던 활명수(活命水) 광고 일부다. 국내 최장수 브랜드인 활명수가 지난달 25일 탄생 111주년을 맞았다. 활명수는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태어났다.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국내 최초 제약회사인 동화약방(동화약품의 전신)이 설립하면서 선보였다. 궁중 선전관(宣傳官)이던 노천(老川) 민병호(閔竝浩)가 궁중요법에 양약의 장점을 더해 내놓았다. 노천은 활명수를 교회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반응을 시험했다. 소화 불량과 급체에 배를 앓기 일쑤였던 백성들에게 활명수는 신통한 명약이었다. 활명수의 기본 성분은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 등 11가지다. 가마솥에 각종 한약재를 넣고 한참 달인다. 우러나온 약물을 고운 체로 걸러낸 뒤 곱게 빻은 아선약과 정향 가루를 탄다.
마지막에 넣는 게 클로로포름과 멘톨(박하)로, 바로 이 두 성분의 배합이 활명수의 특급 비방(秘方)이다. 활명수의 클로로포름과 멘톨 배합률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초창기에도 아선약과 정향 배합까지는 공개했지만 마지막 과정인 클로로포름과 멘톨 첨가만은 책임자가 돌아앉아 몰래 했다.
1910년대 활명수 한 병 값은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사 마실 정도였다. 인기가 높다 보니 보명수(保命水) 회생수(回生水) 통명수(通命水) 활명액(活命液) 같은 유사품도 쏟아졌다. 1920년 출시된 우리나라 최초의 이유식 이름도 활명소(活命素)였다. 골치를 앓던 동화약방은 1910년 심벌마크인 '부채표' 상표를 등록했다.
백성의 속을 풀어주면서 번 돈은 독립자금으로도 쓰였다. 초대 사장 민강(閔�)은 1919년 회사에 상해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인 연통부를 설치하고 활명수 판매금 일부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60년대는 '활명수 칵테일'이 유행했다. 소주 판촉에 나섰던 진로소주 영업팀이 술집을 돌아다니며 소주에 활명수를 타 마셔댔다. 소주의 쓴맛을 없애주고 양주처럼 보이게 하는 이 제조법은 주당 사이에 유행이 됐다. 이 무렵 탄산 성분을 첨가한 까스 활명수도 나왔다. 당시 인기몰이를 하던 코카콜라의 기세에 까스 활명수를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로 전환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활명수 제조에 사용된 우물 터가 발견됐다. 서울 중구 순화동 본사 보일러실 내부에 있는 우물 터는 지름 90㎝, 깊이 4.5m 크기. 1940년까지 이 우물물로 활명수를 제조했으나 1966년 본사 사옥이 신축되면서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