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부산 서구 동대신동 화랑초등학교 6학년 교실. 담임 명은정 교사가 4~6명씩 무리를 지어 둘러앉은 학생들에게 도화지 한 장과 도형 그림 9개를 나눠줬다.
한 여학생이 삼각기둥을 손에 들고 "이건 뭐지(What's this?)"라고 영어로 묻자 한 남학생이 "그건 B그룹이야. 밑면이 2개지(It's group B. It has two bases.)"라고 대답한다. 학생들이 토의를 하며 9개의 도형을 둘로 구분하기를 마치자, 한 명씩 칠판 앞으로 나와 영어로 발표를 했다.
같은 날 오후 부산 강서구 대저초등학교 6학년 교실. 학생들 앞에 선 담임 류진형 교사가 "나를 나무라고 생각해봐. 나는 어떻게 먹을 것을 만들지(Imagine that I'm a tree. How can I make my food?)"라고 천천히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교실에 있던 20명의 학생들은 웅성거리듯 "공기(air)", "물(water)", "햇빛(sun)" 등의 영어 단어를 얘기했다. 완전한 문장을 구사하는 아이는 없었지만, 저마다 식물의 광합성작용에 필요한 것들을 영어단어로 목청껏 외쳐댔다.
사(私)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초등학교에서 영어로 하는 수학·과학 수업이 성공적인 교육사례로 자리잡고 있다. 부산 대저·화랑초등학교가 그 현장. 두 학교에서는 평소 영어학원에 가보지 못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더듬더듬 영어 말문을 트고 있었다.
◆사교육에서 소외된 아이들에게 희망을
지난해 부산시 교육청은 5개 초등학교를 '영어교육 연구학교'로 지정했다. 이 중 화랑초와 대저초는 재학생 다수가 영어학원을 다녀보지 못했을 정도로 교육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1910년 개교한 화랑초는 도심 공동화(空洞化)로 학급이 30~40년 전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학교는 오래된 건물과 좁은 골목이 둘러싸고 있고 학생 35.2%는 영어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화랑초 하숙주 교장은 "영어수업에서도 교사의 35%가 우리말로 수업을 진행했고 영어관련 시설이라고는 어학실 1개가 고작이었다"고 말했다.
대저초는 좀더 상황이 심각했다. 벼농사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가정이 주를 이루고, 재학생 15% 정도가 편부모 가정이다. 76.6%가 영어학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태권도학원이나 보습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거나, 학습지를 통해 혼자서 영어를 익히는 정도였다.
바로 이러한 점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움직였다. 영어의 중요성은 사회에서 점차 높아가는데, 사교육으로 영어를 배울 수 없는 두 학교 학생들은 점점 뒤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사들 자존심 버리고 영어공부
교사들은 작년 4월부터 재량학습과 특별학습 시간을 활용한 영어교육을 강화하기로 했다. 기존에 학년별로 주당 1~2시간인 영어수업시간을 2배 이상 늘린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은 '내용 중심의 영어교육'을 하기로 결정했다. 정규 수업에서 가르쳤던 수학이나 과학 등의 내용을 영어를 이용해 다시 가르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미 우리말로 공부했던 내용이라 학생들이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 4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화랑초 교사 중 영어수업에 자신 있다는 교사는 10% 정도. "영어를 전공하지도 않은 선생님들이 무슨 영어를 가르치냐"는 학부모들의 반응이 나왔다.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겠다"고 하자, 일부 학부모는 "아이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라며 반대했다.
교사들은 자신들의 영어회화 능력부터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교실에서 사용할 영어를 배우기 위해 교내 원어민 교사에게 매주 4시간씩 회화수업을 받았다. 교사들이 출퇴근하는 길에 학생들 앞에서도 회화 교재를 공부하는 풍경이 두 학교에서 펼쳐졌다.
◆영어에 자신감 갖게 된 학생들
시행 8개월 후, 두 학교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대저초 학생들의 80%(이전 64%)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할 수 있다고 답했고, 43.8%(이전 24.8%)가 "길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 외국인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하겠다"고 답했다. 화랑초에서는 학생 56%(이전 25%)가 "영어에 자신 있다"고 대답했다. 대저초 6학년 이지수군은 "선생님과 얘기하다 보면 저절로 한두 단어씩 영어를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대저초 최재성 교장과 화랑초 하숙주 교장은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게 돼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