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번 피고인 앞으로 나오세요." "…" "피고인 안 나왔습니까?"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아파트 분양사업 투자금 명목으로 15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Y시공사 대표 원모(58)씨에 대한 선고가 예정돼 있었지만, 원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검찰은 원씨에 대해 징역 5년을 구형한 상태였다. 재판부는 원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해 체포에 나섰지만,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잡히지 않고 있다.

외제차 영업사원 이모(41)씨는 차를 판 수익 3억4000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뒤 징역 2년이 구형되자, "회사와 합의하겠으니 기다려달라"며 선고를 3차례 연기시킨 뒤 한 달째 나타나지 않고 있다.

최근 이처럼 실형 선고를 우려해 잠적하는 피고인들이 늘고 있다. 형사 재판에서 '불구속 재판' 원칙이 강조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부작용이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도망가면 잡기 힘들어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일주일에 10여건을 선고하면, 1~2건은 피고인이 안 나와 선고를 연기하는 실정"이라며 "구속 재판이 70~80%를 차지했던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출석해 "겁이 나서 그랬다" "몸이 아팠다" "자살하려고 산에 다녀왔다"는 등 가지각색 해명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작정하고 도망가버린 피고인들은 영영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집행유예형만 받아도 추방되는 외국인들은 잠적하는 비율이 더 많다고 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아 구속영장을 발부했는데도 1년 이상 잡지 못해 처벌하지 못한 피고인은 2002년 49명에서 2005년 130명으로 늘었고, 2007년에는 185명에 달했다. 5년 만에 4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재판을 받다 도망간 사람들을 잡기 위해 쏟아 부을 경찰 인력이 많지 않은 데다, 잡아도 공(功)을 세운 것으로 크게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수사기관의 설명이다. 특히 해외로 도피해버릴 경우, 영구 미제로 남게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국제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은 국가의 경우도, 남의 나라 잡범을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김경준이나 정명석(JMS 총재)처럼 중요 사건 피의자가 아니면, 해외도피자를 잡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돈 있는 사람들은 해외 도피로 처벌을 면하게 되는 꼴"이라고 말했다.

"구속 재판 땐 직장 해고 등 피해 많아"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년 9월 취임 당시 "구속이 남용돼선 안 된다. 구속 되면 사람들 피눈물 난다"며 불구속 재판을 강조했다.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억울한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피고인 방어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법정에서 죄가 명백히 입증됐을 때에만 엄벌하자는 취지다. 이에 따라 2002년 58.4%였던 불구속 기소율은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2005년에는 73.8%로 증가했다. 2008년 9월 현재 법원의 불구속 재판율은 85.5%에 달하고 있다.

법원·검찰간 갈등의 상징처럼 돼버린 구속영장 기각율은 2004년 14.8%에서 2008년(7월 기준)엔 23.9%로 10% 가까이 증가했다. 서울중앙지검의 경우엔 32.4%에 달한다.

검찰은 "영장 기각과 불구속 재판이 늘면서 수사에 어려움이 많고, 피고인 출석도 보장 받지 못하게 됐다"고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그러나 판사들은 불구속 재판의 긍정적인 면이 더 크다고 강조한다.

서울중앙지법 마용주 공보판사는 "구속된 피고인들은 재판에서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기 힘들어지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며 "재판에서 충분히 다툰 뒤 지은 죄만큼 벌을 받으면 받아들이기도 쉬워진다"고 말했다.

'재판 불출석' 처벌 기준 마련해야

이 같은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실질적인 '인신 구속권'을 어느 쪽이 가질 것이냐를 두고 양측이 팽팽히 맞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법원이 '구속 재판'을 줄이고 '법정 구속'을 늘림으로써 법원의 위상과 권한을 강화하려 한다는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실형 선고 가능성이 높은 중범죄자들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기각율이 높아지고, 법원이 선고 후 법정구속하는 사례는 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엔 사법사상 처음으로 1심에서 구속기소된 피고인 수보다, 실형을 선고 받은 피고인 수가 많아졌다. 불구속 기소된 피고인 가운데 5347명이 실형을 선고 받아 법정구속됐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검 한 부장검사는 "절도·사기·폭행·상해 등 중범죄자들이 죄값을 치르지 않고 거리를 활보할 경우, 피해는 결국 국민들에게 돌아간다"며 "불구속 기준을 지금보다 엄격히 하고 재판 불출석에 대한 처벌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