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시인

가을이 깊어지며 축제를 준비하는 자치단체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있다. 지역 특산물을 내세워 급조된 졸속 축제도 없지 않으나 오래 곰삭은 정신적 산물을 기반으로 한 축제도 여러 곳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부산이 준비하고 있는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1908~1996)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도 그중 하나다. '21세기 생명과 평화를 찾아서'라는 부제로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강연·백일장·문학기행·흉상제막·세미나·국제학술회의·연극공연 등이 이어진다.

끈질길 정도로 부산과 그 근교를 사랑했던 요산은 지역의 문제가 민족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인류 공동의 문제라는 것을 작품으로 입증해 보인 작가였다. 선생은 잠시 동안의 유학과 교사생활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부산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요산의 소설 언어에는 화통하고 질박한 부산 사투리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겼다. 문체의 높낮이와 호흡은 자분자분 정이 넘치고, 텁텁한 막걸리 냄새가 나며, 한바탕 불호령이 떨어지는 변화무쌍한 부산의 감성곡선과 일치한다.

필자가 선생을 가까이서 뵌 것이 1985년 5월 7일 저녁 광복동 입구 화국반점에서였다. 부산문단, 나아가 한국문단의 중요한 한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모인 사람은 서른아홉 명. 탁자에는 소주와 고량주, 안주 겸 식사라고 해야 할 자장면 짬뽕 군만두 같은 것들이 있었다. 선생은 독립군 대장 같았고 어둑한 중국집 2층은 임시정부의 비밀 아지트 같았다. 그중 몇은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당장 폭탄을 안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 기세였다.

"서울에서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부산에서 이래 가만히 있어 되겠나. 정신 똑바로 박힌 놈들이몬 한번 꿈틀거려 봐야 할 거 아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5·7문학협의회였다. 이름을 짓느라 의견이 분분할 때 "오늘이 5월 7일 아이가. 러시아 혁명과 조선의 3·1운동 영향을 받아 일어난 중국의 반제국주의 5·4운동도 있으이 우리는 5·7문학협의회로 하자." 그렇게 '문학창작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 실현'을 목표로 태동했던 부산의 자생적 문인 단체가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부산작가회의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서슬 퍼런 신군부에 맞서 회보 기관지 등에 성명서와 작품으로 자유와 정의를 외쳤다. 중앙에 종속되지 않는 지역문학의 의미 있는 행보로 기억될 만하다.

나는 그 시절 출판 잡지사 일을 했던 터라 가끔 바람을 쐬러 나오시는 선생을 뵐 수 있었다. 선생이 자식처럼 여기시던 윤정규 선생과 함께 중국집에서 낮술을 마시기도 했고, 찻집에 홀로 계신 선생을 뵈러 간 기억도 난다. 1987년 내 첫 시집이 나왔을 때는 조촐한 축하자리에 오셔서 과분한 축사를 해주시기도 했다. 대신동 아파트에서 칩거하시던 말년에는 새로 쓴 산문 한 편을 건네주시며 "네가 잡지를 만든다는데 뭐든 하나 해주야 될 것 같아 오랜만에 썼다"고 하셨다.

선생의 장례는 1996년 11월 남천성당에서 치러졌다. 나는 매일 빈소에 드나들었지만 조문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 있다 하리라, 마지막에 어쩔 수 없어지면 하리라, 다짐하고 있다가 정작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지 못했다. 허겁지겁 달려갔을 때 운구행렬은 이미 떠난 뒤였고 노제가 열린다는 부산대 운동장까지 쫓아갔지만 이미 장지로 떠난 후였다. 그래서 더욱더 선생은 나에게 살아있는 하나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하면, 허튼 수작이 되어가고 있는 시를 잡고 끙끙대고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뒤통수를 후려치신다. "세상에 이름 모를 꽃, 이름 없는 꽃이 어딨노. 시인이라면 낱낱이 찾아서 붙여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