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이 월가를 흔들었다. 세계 5위의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와 벌이던 인수협상이 사실상 결렬되자, 리먼의 주가가 폭락했고 월가의 다른 주식들도 추락했다.
지금 리먼브러더스는 베어스턴스라는 거목을 쓰러뜨린 초대형 태풍 '서브프라임(비우량주택담보대출)'의 치명적인 우측 반경에 위태롭게 놓여 있다. 위대했지만 골병이 든 이 월가의 맹수를 한국의 산업은행이 잡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사실상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상황은 끝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2, 제3의 리먼브러더스를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난 인수 논의 과정을 한번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 건을 두고 그동안 국내에선 '100년에 한 번 올 기회'라며 놓치기 아깝다는 '포획론'과 '너무 덩치가 크고 위험하다'는 '포기론'이 서로 팽팽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진실이 있다. 이번 사냥은 그만큼 위험했고, 한국의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 정글에는 외지에서 날아온 사냥꾼에게만 적용되는 룰이 있다. 맹수는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수의 이름을 그대로 내걸고, 맹수의 안내에 따라 정글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베어스턴스, 리먼브러더스 등 병들기 전 화려한 맹수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그 위에 올라타고 싶은 것이다.
반면 월스트리트 정글의 생태계에 훤한 미국의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등은 옵션이 많다. 필요하면 맹수를 죽일 수 있다. 이른바 구조조정을 통해 비싼 가죽만 벗겨내 팔 수도 있다. 그래서 리먼브러더스의 인수후보자 명단엔 블랙스톤과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 등 사냥에 이골이 난 미국 사모펀드의 이름이 올라 있다.
월가 사냥이 우리가 처음은 아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보다 앞서 간 외지의 사냥꾼이 있다. 바로 일본이다.
엔고(高)로 일본의 금고가 차고 넘치던 1980년대 후반, 일본 금융자본은 앞다퉈 미국 본토에 상륙했다. 선진 금융상품인 선물옵션 비즈니스를 확대하기 위해 노무라, 다이와 등이 시카고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일본 노무라증권은 선물옵션 분야의 중견기업인 미국 'GNP카모디티즈'를 거액을 주고 인수했다. 하지만 일본기업이 들어오자 미국의 핵심직원들이 대거 직장을 떠나 GNP카모디티즈는 사실상 빈 껍데기만 남았다. 노무라증권은 결국 큰 손실을 본 뒤 발을 빼고 말았다.
화려한 이름을 좇다 톡톡히 값을 치른 더 극적인 사례는 일본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록펠러센터빌딩을 구입한 일이다. 1989년 이 유서 깊은 미국의 자존심을 일본 '미쓰비시부동산'이 당시 약 20억 달러를 주고 사들이자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며 세계가 흥분했다. 하지만 이후 부동산 경기 침체로 매년 록펠러센터빌딩 운영은 수백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고, 모기지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미쓰비시는 6년 만에 다시 헐값에 미국기업에 넘겨주고 말았다.
글로벌 인수합병(M&A)에서 가장 쉬운 게 인수라고 한다. 그러나 인수 뒤, '합병 후 통합 과정'에 실패해 큰 손실을 본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동안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논의에서 거창한 총론은 들렸지만, 구체적인 각론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월가의 맹수를 포획한 뒤 잘 조련시킬 실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이 질문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부자인 미국은 사냥을 하다 실패해서 하나쯤 망가져도 상관없지만, 사실상 국고를 걸고 베팅하는 우리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