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얼마 전 '오바마의 다섯 얼굴'이란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실었다. 광고 형식을 띤 이 기사는 "당신은 오바마 후보를 보며 무엇을 먼저 떠올리는가?"라고 묻고, 1)흑인(Black man) 2)(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치료사(Healer) 3)(국정경험이 없는) 풋내기(novice) 4)급진주의자(radical) 5)미래(the future) 등 다섯 가지 보기를 들었다. 성향에 따라 보기 중 하나를 고를 테지만 그건 기사가 의도한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6)번, '다섯 가지 모두 오바마의 얼굴'(all of the above)이다.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가 종반전으로 접어들었지만 버락 오바마를 둘러싼 정체성 시비는 여전한 모양이다. 민주당은 오바마의 '위험하고 못 미더운 얼굴'보다 '변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이미지 광고에 돈을 쏟아 부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배경엔 "오바마가 누구고 무얼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미 유권자들의 불안감이 깔려있다.
그걸 보면서 우리 정부와 한나라당이 지금 국민들에게 "당신은 대통령을 보면서 먼저 무엇을 떠올리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모르긴 몰라도 '청계천을 되살리고 대중교통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박수 받았던 서울시장'이나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성공신화 CEO'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오히려 '인사·정책 실패를 거듭한 강부자·고소영 내각', '쇠고기 파동과 촛불 시위에 휘둘려 일다운 일 하나 한 것 없이 허송한 지난 6개월'이 먼저 대통령 얼굴에 겹쳐지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종교적 편향으로 불교계의 반발을 사고 있는 '기독교인 이명박'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얼굴'은 단순히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의 정체성과 리더십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대통령 얼굴이 흐릿하고 이랬다 저랬다 바뀌면 국민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상황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작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 입에서조차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의 정체성과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이 지경이라면 국민이 대통령 말과 정부 정책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다.
정부가 건설경기를 부양하겠다며 양도소득세 감면을 포함한 부동산종합대책을 내놓은 지난달 21일 건설업체 주가는 일제히 더 주저앉았다. 월 스트리트저널이 "한국에 대처와 레이건의 정신이 살아 있다"고 칭찬한 대규모 감세(減稅)안이 발표된 지난 1일에도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60포인트 가까이 더 빠졌다. 외환시장도 갈지자 환율 정책을 비웃으며 연일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당국은 환율을 방어한답시고 지난 두 달 사이 200억 달러에 이르는 아까운 외환보유액을 축내면서 체면만 구겼다.
최근 금융시장은 '9월 위기설'로 보름 넘게 요동을 쳤다. 그동안 가만히 있던 기획재정부는 지난 주말에야 대책회의라고 열어 "9월 위기는 없다"고 해명했다. 한 정부인사는 "위기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위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외환위기 같은 경제파국은 없을 것이란 말로 들린다. 우리 기업과 은행의 재무구조가 1997년 환란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정체성과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위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2의 외환위기가 온다면 그건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