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한 10대 그룹의 주력 계열사는 "올해 7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연간 매출액이 20조원을 조금 넘는 회사가 매출액의 30%에 해당하는 거액을 투자하겠다니 귀가 솔깃할 일이었다. 고용도 꽤 늘겠거니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자 내역을 들여다보니 이런 기대가 무색해졌다. 전체 투자의 60%가량인 4조1000억원이 국내 고용 유발 효과가 거의 없는 설비 개·보수 투자와 해외투자였다. 나머지 40% 투자 중에도 고용 효과가 두드러지는 분야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기업을 비난하기도 쉽지 않았다. 설비 개·보수를 통해 직원 1인당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첨단제품 개발 능력을 키우는 것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넓히고 원료 자원을 확보하는 것도 권장할 일이지 만류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이 회사는 중국 경쟁업체에 비해 2배에 가까운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다.
대기업 투자가 국내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내의 비싼 땅값, 생산성에 비해 높은 임금, 만성적인 노사분규, 지나친 규제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기업의 글로벌화에 있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낸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해외 매출 비중은 전체 매출의 45.5%에 달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그 수치는 70%에 이른다. 시장이 글로벌화되면서 무역 장벽을 넘기 위한 해외 직접투자도 가속화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해외 생산 비중이 40%나 된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을 정부·여당이 최근 1주일이 멀다 하고 대기업 투자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여당 대표가 "재벌들이 몇십조원씩 돈을 쌓아놓고도 투자를 안 한다"며 힐난하자, 여당 대변인은 "욕 들어가며 특별사면해줬더니 투자는 뒷전"이라고 후속타를 날렸다. 취임 초 "중요한 것은 투자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공언했던 이명박 대통령마저 "대기업이 규제완화만 기다리지 말고 공격적인 투자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거들고 나섰다. 재계는 오는 18일 청와대 간담회에서 또 어떤 '훈계'가 쏟아질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부·여당 입장에서는 친기업정책을 표방하며 재계의 민원을 도맡아 해결하고 있는데, 재계가 도와주지 않는 것이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벌 공격'을 통해 그동안 까먹은 지지표를 되찾겠다는 속내도 없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이런 비난이 실제 투자 증가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경영자(CEO)로 일했던 1970년~80년대와 전혀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 대기업들이 '묻지마 투자'를 해도 될 만한 고도성장 시대도 아니고, 국내외 주주의 감시도 치열하다. '돈의 논리'를 따르기 마련인 기업을 윽박지른다고 투자가 술술 풀릴지도 의문이다.
대기업을 비난하기 앞서 정부·여당이 해야 할 일은 투자의 걸림돌을 해소해 경쟁 국가에 못지않은 투자 환경을 갖출 수 있도록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서비스업 등 낙후한 산업 분야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투자 영역을 창출하는 국가적 전략도 내놓아야 한다.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이끌겠다는 MB노믹스의 한 축이 고작 '대기업 목 비틀기'라면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