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6일 또다시 핵 문제에서 벼랑 끝 전술을 들고 나왔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지연을 이유로 영변 핵 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이미 불능화한 시설들의 원상복구까지 고려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베이징(北京)올림픽이 끝나면 북한이 뭔가 수(手)를 쓰고 나오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결국 부시 미 행정부에 대한 기대는 이쯤에서 접고 미국의 새 정권과 상대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 또는 한국의 정권 교체기마다 위기 국면을 만들어놓고 양측 새 정부와 '승부'를 보는 고약한 버릇이 또 도졌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6월 27일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하고 있다. 북한은 핵 불능화 의지를 국제사회에 과시하기 위해 이런‘폭파쇼’까지 벌였지만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를 계속 미루자 26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불능화 조치 중단을 발표했다.

북한, 왜 이러나

북한은 이날 성명에서 자신들은 10·3 합의에 따라 핵 신고서를 제출했는데 미국이 그 대가로 약속한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의회 통보기간이 끝나 미국 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할 수 있는 날짜는 지난 11일이었다.

북한은 지난 6월 자신들의 과거 핵 활동을 담았다는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 등 대북 협상팀이 너무 쉽게 북한을 믿고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 등을 약속했다는 강경론이 득세하면서, 미국은 북한이 제출한 신고서 내용을 확인하며 검증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은 이번에는 신고만 하고 검증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종 단계에 가서 남북한이 동시에 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미국은 '신고와 검증은 한 패키지'라며 플루토늄과 우라늄농축, 핵확산 부분에 대한 검증을 확실히 해야 한다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은 당초 약속한 불능화 조치 11개 중 폐연료봉 인출, 미사용 연료봉 처리, 원자로 제어봉 구동장치 제거 등 3개를 끝내지 않은 상태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8000개의 사용 후 연료봉 중 하루 30개 정도씩 지금까지 4800여 개를 인출했으나 지난 14일부터 이 작업을 중단했다"고 전했다.

이날 북한 발표에 대해 김성한 고려대 교수는 "북한은 미국에 검증 수준을 너무 강하게 가져가지 말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며 "결국 미국에 부시 대통령 임기 중에 플루토늄 검증이라도 얻든지 북핵 문제를 원점으로 돌리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압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은 "부시 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한 것도 북한이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고 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 군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북한이 이날 성명에서 "우리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영변 핵시설들을 곧 원상 복구하는 조치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대목은 북 군부를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북핵 어디로 가나

전문가들은 북한이 당분간 미국의 대응을 기다리면서 다음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유환 교수는 "북한이 베이징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미국에 선택을 압박하고 있다"며 "미국의 테러지원국 삭제 가능성이 남아 있는 만큼 압박하는 정도이지 판을 깨자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도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켜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끌고 가겠다는 차원에서 자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반면 경남대 김근식 교수는 "북한이 길게는 내년 6월 미국 새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때까지 버텨보겠다고 입장을 정리하고 이번 성명을 낸 것 같다"고 말했다.


불능화 (disablement)

북한 영변에 있는 핵 시설을 못 쓰게 만드는 조치를 말한다. 북한은 2007년 6자회담 2·13합의에서 핵문제 해결을 위한 1단계 이행조치로 핵 시설을 폐쇄(shut down)하고, 2단계 이행조치로 불능화에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