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오전 8시30분쯤 출근하던 정연주 KBS 사장은 11일 9시를 훨씬 넘겨 출근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돼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일 KBS 이사회가 제출한 정 사장 해임제청안에 서명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KBS 관계자는 "회사에 오기 전까지 정 사장은 자신의 해임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3년 4월 취임 이후 2006년 연임해 KBS 사장으로 5년 4개월여를 지내며 편파방송·무능경영·내부갈등조장 같은 숱한 비판 속에도 '바위와 같이 버티겠다'고 버티던 정 사장이 이날 공식 해임됐다.
◆鄭사장, 마지막 출근날 챙긴 건?
정 사장 해임이 확정된 사내 규정에 따라 KBS는 이원군 부사장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됐다. 정 사장은 이날 오전 이원군 부사장을 만났다. 정 사장은 "내일(12일) 예정된 확대 간부회의는 취소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 사장은 12일부터는 출근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 홍보실은 이날 11시쯤 '대통령 해임조치에 대한 정연주 사장 입장'이라는 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정 사장은 이 자료에서 ▲이번 해임 조치의 부당성을 알리는 법적 투쟁을 벌이고 ▲이런 조치를 취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집단과 인사들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하겠다고 밝혔다. 명의는 'KBS 사장 정연주'였다. 장외 투쟁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의 이른바 '입장' 발표는 감사원 감사결과 발표 이튿날인 지난 6일, KBS이사회가 해임제청안을 가결한 지난 8일에 이어 3번째이다.
KBS 한 간부는 "2006년 11월 KBS 구성원의 압도적인 반대 속에, '대선용 낙하산 인사'라는 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KBS에 재입성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반성도 없는 자기변명의 연속"이라고 평했다.
정 사장은 이날 사무실에서 개인 짐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 홍보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전달해 오던 정 사장은 해임이 확정되자 비서실을 통해 KBS 출입기자 메일링 리스트를 받아갔다고 한다. 이제 정 사장이 직접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주 중 후임 사장 논의
유재천 KBS이사장은 이날 "대통령의 해임 결정에 대해 다른 언급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며 "13일 이사회부터 후임 사장 추천 절차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KBS노조는 '국민참여형 사장선임제'를 제안한 상태다. 이사회 추천 8명, 노조 추천 7명으로 구성된 15명의 사장추천위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반면 정 사장 해임을 반대해 온 PD협회, 기자협회 소속 일부 직원들은 11일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사원행동'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KBS노조와 별도의 행동에 돌입했다. '친정(親鄭·친 정연주 사장)' 세력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정 사장에 대한 해임제청안을 의결한 KBS이사회는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KBS사원행동 출범식을 지켜보던 KBS 한 직원은 "오늘 KBS사원행동 출범식에 KBS노조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며 "지난 5년간 서로 감정의 골이 얼마나 파였는지 보여주는 현장인 것 같다"고 말했다.
◆ 누가 '정연주의 유산' 처리할까
현재 KBS 차기 사장 후보로는 김인규 전 KBS 이사, 안국정 SBS 부회장, 강동순 전 KBS 감사, 이민희 전 KBS 미디어 사장,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 등 주로 'KBS 출신'들이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오명 건국대 총장 등 외부 인사도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누가 되든 감사원과 KBS이사회가 지적한 KBS의 문제, 즉 정 사장 5년 동안 굳어진 경영수지의 적자 구조화, 탄핵방송으로 대표되는 KBS의 공정성 훼손 극복, 사내 세력간의 첨예한 갈등 등을 극복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한다. 올해에만 KBS는 10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황근 선문대 신방과 교수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이면서 여야와 KBS 내 갈등 세력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진 인물이 들어와야 한다"며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현재의 갈등만 더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