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7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였다. 서구에서는 5월 8일을, 러시아에서는 5월 9일을 종전일(終戰日)로 성대하게 기념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 최종적 마침표를 찍은 날은 8월 15일이다. 이날은 승패를 넘어 아·태지역의 민초들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흙 다시 만져보고 바닷물이 춤추는" 생의 환희에 동참했던 날이다.
아시아·태평양에서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된 이유는 미국의 '유럽 우선'(Europe First) 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전 방식을 놓고 "어떻게 패배할 것인가"를 치밀하게 연구했던 일본의 전략이 더 큰 원인이었다.
첫째, 우티 포시데티스(Uti possidetis). 이 공식은 전시(戰時)에 "소유한 대로"(as you possess)의 영토를 서로 인정하고 종전하는 것이다. 일본이 가장 원했던 종전 방식이다.
둘째, 스타투스 쿠오 안테 벨룸(Status Quo Ante Bellum). 이것은 전전(戰前) 상태로의 환원을 통한 평화를 의미했다.
셋째, 전쟁범죄국에 대한 징벌. 이것은 전승국들이 패전국의 영토를 전전 상태로 환원하는 것을 넘어서 징벌적으로 축소할 수도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독일제국이 이런 운명을 겪었다. 일왕제의 훼손과 더불어 일본의 패전전략가들이 가장 피하고자 했던 종전 방식이었다.
일본은 두 번째 종전 방식으로 후퇴하면서 전전시점(戰前時點)을 1941년 진주만기습(미국이 '태평양전쟁'이라고 불렀던 전쟁의 시점) 이전, 최소한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시점으로 합의할 수 있기를 바랐다. 1919년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베르사유체제와 워싱턴체제에 의해 공인받은 선까지만 후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독도는 물론 대만과 한반도를 통째로 영유하는 시나리오였다.
연합국 측이 일본과의 '협상을 통한 종전'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했던 것은 이러한 복잡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특히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지 말았어야 했다는 도덕률에 도전할 세계인은 없다. 그러나 원폭투하로까지 전쟁을 끌고 갔던 일본 전략가들의 집요한 패전전략을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난 7월 말 유럽에서 개최된 세계국제학대회에서 히로시마평화공원의 소프트 파워를 다룬 일본 학자의 발표가 있었다. 홀로코스트박물관의 소프트 파워에 비해 히로시마의 소프트 파워가 쇠퇴하고 있다는 논지와 관련하여 과연 홀로코스트와 히로시마가 동급에서 비교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히로시마 내 사랑'과 같은 프랑스 영화가 대표적이지만, 히로시마는 마땅히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추념의 몫까지 전유해왔다. 야스쿠니식으로 8·15를 기념하는 것에 대한 대안인 것처럼 비치는 히로시마식 8·15를 경계하는 까닭이다.
1945년 8·15종전 이후 아시아·태평양지역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 그러나 진앙들 중 하나는 1951년 일본이 49개 참전국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다. 6·25전쟁의 충격, 그리고 지나치게 가혹했던 베르사유평화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반성이 패전국 일본에게 너무나 관용적인 평화조약을 선사했다. 두 번째 진앙은 대한제국이 최초로 근대적 주권영역을 확립할 당시부터 경계해 마지 않았던 중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인식이다. 세 번째 진앙은 남북한의 분단상황이다.
8·15는 코리아의 광복절인 동시에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글로벌한 가치를 지닌 날이다. 지난 60년 세계적 이적을 이룬 대한민국의 주도로 매년 8월 15일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념해보자. 그리하여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뛰어넘는 평화를 향해 한 걸음이라도 전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또한 이 정부가 표방하는 '글로벌 코리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