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세 뉴욕 특파원

2008년 7월 29일은 한국 팬들에게 낯익은 세계 금융 선수들이 미국 월가의 같은 무대에 올라 단기 승부를 본 날이다.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미국 메릴린치를 걸고 벌인 승부에서, 한국 대표로는 동북아금융허브의 꿈나무, 한국투자공사(KIC)가 링 위에 올랐고, 반대 편엔 한국 금융의 라이벌인 싱가포르의 국부(國富)펀드 테마섹이 글러브를 꼈다.

같이 링에 올랐지만, 체급은 달랐다. 한국투자공사는 올해 1월 메릴린치에 20억 달러를 투자한 반면, 테마섹은 지난해 12월 두 배가 넘는 44억 달러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경기가 격렬해지면서, 문제는 체급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미국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와 양대 모기지기관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등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메릴린치의 주가가 높아야 이기는 투자게임에서 선수들은 모두 돈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한국투자공사는 결국 평가손실액이 약 8억 달러에 이르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높은 배당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그나마 낮은 가격에 주식을 바꿀 수 있는 옵션을 선택했다.

위기의 순간, 노련한 테마섹은 결정적인 안전 장치를 꺼냈다. 메릴린치와 계약하면서 사실상 1년 내에 주가가 주당 48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모든 차액을 돌려받기로 한 것이다. 무려 25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다. 테마섹은 이 대목에서 다시 베팅했다. 9억 달러의 새 돈을 보태 현재 주가보다 좀 더 낮은 가격으로 다시 메릴린치의 주식을 사들여 지분을 최대 15%까지 높였다. 아시아의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월가의 거대 투자은행 메릴린치를 손에 넣는 순간이다.

세계 금융을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한국 대표가 초반에 큰 손실을 보고 뒤로 물러날 때, 같은 링 위의 싱가포르 대표가 초반 승기를 잡고 대규모 공세를 벌이고 있다고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발(發) 금융대전은 결정적인 흥행요소를 하나 더 얹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악명 높은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가 갑자기 링 위에 등장했다. 론스타는 바로 이날 메릴린치의 모기지 부실 채권 306억 달러어치를 67억달러에 인수했다. 1달러짜리 채권을 22센트에 후려쳤다. 그나마 인수대금 중 75%는 메릴린치가 빌려주고, 손실이 나면 이 부분도 메릴린치가 떠안는 구조다. 폐허에서 돈 냄새를 맡는 론스타는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틈타 한국시장에서 포식한 후, 이제 다시 자기 본토로 돌아와 사냥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론스타 펀드에 경쟁적으로 돈을 넣어, 론스타가 최근 출시한 2개 펀드는 목표금액을 초과 달성했다. 미국 언론은 "위험한 부실채권을 다루는 데 있어 프로인 론스타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했다"는 관전평을 쓰고 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아 장기적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초반 승부는 분명하게 판가름이 났다. 돈 놓고 돈 먹는 월가의 금융 게임은 결과로 말할 뿐이다. 외환위기 직후 외국자본의 포식에 분노했던 한국 금융은 이제 먹이를 찾아 나섰지만, 실력 부족을 절감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론스타가 적어도 합법의 영역에서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절치부심하며 실력을 쌓는 대신 우리는 그동안 허망한 '헐값 매각 논쟁'으로 초가삼간을 태우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