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생활 24년간을 뒷바라지하면서 증오심도 끓어올랐고 억장 무너지는 순간순간을 맞으며 남편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 하느님께 질문하려다가 입을 닫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겠니.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 있었다. 그것이 24년간의 우리 부부생활이었다. 나는 24년 동안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 죄악의 동기는 남편이었고 그 죄악을 근절한 것도 남편이었다. 나는 그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래, 물론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얼마나 그가 죽기를 기다렸겠니. 아, 그런데도 그가 숨이 멎는 그 순간에 나는 신통력을 갖고 싶었다. 아! 소리치며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가 죽는 일에 죽어도 동의할 수 없다는 폭발적 외침이 저 밑바닥에서 절절 끓어올랐다.'
시인 신달자(65)씨는 최근 낸 수필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에서 이렇게 되뇌고 있다. 하지만 지난 7월 8일 본사 주필 서재에 들어온 그녀는 매우 밝은 모습이었다.
강천석/차근차근 읽어보니 1977년부터 지금까지 31년간의 세월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라는 수필집 한 권에 녹아있네요. 피 토하듯 한 세월을 솔직하게 토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됐나요.
신달자/ 한 번도 예기치 못했던 일들과 거듭 맞닥뜨리면서 좌절하기보다는 ‘이 순간들을 꼭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글 쓰는 사람에겐 그런 게 있어요. 1977년 5월 제 생일날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이는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시어머니가 9년 동안 투병하다가 돌아가셨고 저도 2005년 유방암에 걸렸어요.
강천석/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사를 기록하기는 어렵죠. 부군(고 심현성 교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겠군요.
신달자/ 그렇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시집 작업 때문에 민음사 박맹호 회장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히 이야기가 나왔고,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은 거죠. 교정을 보면서 원고를 쓸 때보다 더 많이 울었어요. 개인적인 내용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두 꼭지만 빼면 안 되겠냐’고 이야기했더니 ‘그 두 꼭지를 빼면 책을 낼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강천석/그 두 꼭지가 어떤 이야기였나요.
신달자/ 대학원 가기 전에 옷감 장사하다 친지의 냉대를 받고 그 옷감들을 목욕탕에 던져 넣었던 것과 제가 유방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던 거예요. 그때 기억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고, 빼고 싶었어요.
강천석/본인 스스로가 환자가 되고 난 후에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는 이야기도 나오던데요. 딸이 셋이나 있는데도 전화할 사람이 없다는 데서 남편의 부재(不在)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에요.
신달자/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 말고 없더라고요.
강천석/부부는 무촌(無寸)이기에 남일 수도 있고 나와 동일체(同一體)일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신달자/ 자식들에게 말하면 너무 걱정할까봐 도저히 이야기 못하겠데요.
강천석/ 책을 읽으며 내내 신 교수만큼 '벼락'을 많이 맞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요. 책의 다음 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이번에는 또 어떤 벼락이 신 교수를 내려칠까 해서요.
신달자/ 친구들도 저보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려운 사정의 친구 손을 붙들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운이 좋다고 하잖니’라며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병에 무식한 것이 도움이 됐나 봐요. 남편이 병실에서 혼수상태에 있을 때는 ‘좀 자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했을 때엔 ‘집에 가면 일어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집에서는 의사, 간호사, 안마사 노릇을 도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남편이 몸을 조금 추스를 만하니까 이번엔 시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시어머니 임종하기까지 9년은 제게 가장 지긋지긋한 시기였어요. (가쁘게 숨을 내쉬며) 전 항상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숨이 가빠요.
강천석/ 신 교수 책을 읽는 사람도 숨이 가쁘니 본인은 정작 어떻겠어요. 하지만 묘한 것은 읽는 것이 고통스러운데도 책을 손에서 떼기는 어렵더라고요.
신달자/ 저는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저와 남편 모두 운명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당해야 할 것을 남편이 당했을 수도 있고요. 남편에게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남편이 투병하면서 정신적으로 삐뚤어지기 시작하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저쪽에 있는 빗자루를 좀 건네주세요’라고 하면 ‘내가 네 종이냐’라면서 저를 빗자루로 마구 때렸어요. 이런 식으로 저에게 모든 걸 풀어버리려 들었고, 남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봐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우울증을 앓기도 했죠. 이 책은 실제 이야기 중 10분의 1만 썼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강천석/ 부군이 처음 쓰러졌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신달자/ 제 35번째 생일날이었어요. 밥상 머리에서 제 옆에 앉은 남편이 갑자기 제게 기대며 쓰러졌어요. 겨우 병원에 데려갔는데 마침 공휴일이라 의사가 몇 명 없었어요.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저는 의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잘 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의사는 ‘남편 상황이 안 좋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하는 거예요. 희망이 없다는 거죠. 그래도 검사는 받아봐야 할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부탁했어요. 의사는 척추에서 뽑은 붉은 물을 보여주면서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은 병원비를 아끼려는 마음이었는지 비몽사몽간에 ‘당신과 아이들도 살아야지. 집으로 가자’고 했고 저는 ‘이 사람을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그걸 꽃피우지도 못하고 간다는 것이 너무 불쌍하기도 했죠.
강천석/ 발병 이전의 신혼여행담을 들어보니 부군이 완전 구식이던데요. 신혼여행 가방이 붉은색이라고 남자가 들 수 없다며 열다섯 살이나 어린 신부에게 들라고 하고, 신혼여행으로는 남들에게 부산으로 간다고 해놓고 돈 아끼려고 인천의 싸구려 여관으로 가고 말이죠. 신랑에 대한 미운 감정이 대단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글을 들여다보면 남편에 대한 미움에는 그리움과 아끼는 감정이 함께 녹아있어요.
신달자/ 제가 가진 남편에 대한 감정을 가장 잘 파악하시는 것 같아요.
강천석/ 신혼 초기 대방동 생활은 그래도 재미있고 아기자기했던 것 같아요. 가장 행복했던 때인 것 같은데 그때 생활은 어땠나요.
신달자/ 결혼할 때 저희는 너무 가난했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친정 아버지 사업이 기울었고요. 남편도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죠. 다행히 남편 고모님이 노량진 일대의 대지주여서 그분에게 대방동 땅을 조금 빌렸고 거기에 남편이 직접 집을 지었어요. 남편은 매주 월요일이면 저에게 3만~5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줬어요. 토요일만 되면 그 사용내역을 써서 내라고 했고 계산이 틀리면 일요일에 반성문을 쓰게 했죠.
강천석/ 남편에게 반성문을 쓰는 기분은 어땠나요.
신달자/ 그래도 웃으면서 썼죠. 남편은 자식들이 크기 전에 빚을 늘려선 안 된다며 매우 아꼈죠.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어요. 전 남편에 비해 허영이 밴 쪽이었고요. 남편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해도 ‘허영’이라고 봤고, 저는 남편을 ‘쪼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제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저는 전생을 믿는 편이에요. 전생에 저는 남편 집에서 일하다가 보석을 훔쳐 나온 여자라고 생각해요. 병수발을 비롯한 모든 것이 전생의 빚을 갚는 과정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제가 중간에 도망쳐 버리면 그 빚이 남아서 제 딸들의 어깨를 누를까봐 걱정이 됐어요.
강천석/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병수발을 했지만 남편의 폭력으로 뼈가 부러질 만큼 밟히는 횡포를 당하면서는 어떤 감정이 들던가요.
신달자/ ‘내 운명이 짓밟히고, 인생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 사람을 이전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세 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남편은 약자이고 환자잖아요. 어느 정도 정상을 만들어 놓아야 제가 벗어날 텐데 그러기에 남편은 너무 약한 존재였어요. 강자는 버려도 약자는 못 버리는 법이죠. 생각해 보면 미련스럽게 참았던 것 같기도 해요. 또 그 미련스러움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고요.
강천석/ 남편이 쓰러지고 20일 동안 중환자실 밖 의자에 기대 지내다가 ‘혜화동의 텅 빈 성당 맨 뒷자리에 앉아 몸 전체로 울고 집에 가니 그동안 버려져 있던 아이들 셋 모두가 수두에 걸려 있었다’라는 이야기도 적혀있어요. 그날 성모마리아를 만났다면서요.
신달자/ 병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젊은 여자가 안 됐다’라는 눈빛을 보냈는데 그게 참을 수 없더라고요. 혜화성당에서 한참을 울고 집에 갔는데, 아이들 셋이 수두로 얼굴 전체에 까만 딱지가 내려앉았더라고요. 그걸 보니 정말 죽고 싶었어요. 애들과 함께 제 삶을 모두 무효화시키고 싶었어요. 함께 껴안고 울다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성모상이 나타나 저를 안고 올라가는 꿈같은 체험을 하게 됐죠. 그 다음날 남편이 깨어났고요.
강천석/ 그 부분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힘이 돼줬구나’라며 이제 고생도 끝나겠구나 했는데, 그때부터 또 새로운 불행이 시작되더라고요.
신달자/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두 달 만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걷기도 했어요. 그 몸으로 강의도 했죠. 남편의 대학은사이신 총장님께서 남편의 사정을 참작해 강의 시간 등을 배려해 주셨어요. 저는 소문나는 것이 싫어 기사 겸 비서를 붙여 남편을 보살피게 했죠. 그렇지만 남편은 ‘시상하부과오종’이라는 병 때문에 몇 시간씩 웃거나 딸꾹질을 하기도 했어요. 강의 하러 집을 나설 때 넥타이를 제대로 맞춰서 매주지 않으면 ‘강의를 안 가겠다’고 떼를 쓰거나 저를 마구 때리기도 했죠.
강천석/ 병원비가 많이 들었을 텐데, 그걸 다 어떻게 감당했나요.
신달자/ ‘산 입에 거미줄 안 친다’는 말이 맞는가 봐요. 1988년 이전에는 빚이 좀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책을 내면서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처음 받은 인세 중 10만원짜리 수표 2장을 어머니 산소에 묻었습니다. 제가 고생만 하는 모습을 보시고 떠난 어머니께 보고를 드린 셈이죠. 이후 번 돈으로 모든 빚을 갚았습니다. 특히 산문집 ‘백치애인’과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가 큰 도움이 됐어요.
강천석/ 책 속에서 제자에게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던 적이 있냐고 묻지 마라’라고 한 구절이 있데요.
신달자/ 저도 여자이기에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겠죠. 대학원에 들어가 보니 제 남편 외에도 잘난 남자들이 많더라고요. 만약 남편이 정상이었다면 제가 사고를 일으켰을지도 모르죠. 당시 여건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갈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요.
강천석/ 부군이 사망하기 전에 간병인을 병실 밖으로 내보낸 후 ‘나 죽은 후에 결혼하지마’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신달자/ ‘정말 대책 없는 인간이다’라고 생각했죠.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제 인생을 가져가려고 하는 건지 마치 도둑놈처럼 느껴졌어요.
강천석/ 남편께서 두 사람의 묏자리까지 미리 파놓았다면서요.
신달자/ 그때도 정말 미웠어요. 저는 화장이 낫다고 생각해요. 죽은 자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남편한테도 화장을 몇 번 권유했는데, 자기 몸 태우는 게 겁이 났나 봐요. 어느 날 자신의 고향에 함께 가자고 해서 갔더니 자신의 묘와 함께 제 것까지 다 파놓은 거예요.
강천석/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놓지 않겠다’는 표시인 것 같은데, 100% 밉기만 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신달자/ 당시엔 그렇게 미웠는데 죽고 나니 다르더라고요. 지금은 마음이 참 편해요. 이 편안함은 단순히 그 사람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마음속으로 욕도 많이 했지만 생전에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줬다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라고 생각해요.
강천석/ 고난의 세월 속에서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신달자/ 신앙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혼자 견딜 수 없어서 찾는 게 아닐까요. 신앙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저도 궁금할 때가 많아요.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라는 회의도 없지 않고요.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 혼자 버티기는 점점 힘들어지죠.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세계에 땅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강천석/ 평생을 남편과 함께 세 딸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그 딸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나요.
신달자/ 첫째 딸은 제가 힘들어 하는 것을 가장 많이 봤어요. 그래서 ‘나는 엄마처럼 고생하며 안 산다’가 그 아이 삶의 목표였죠. 지금은 좋은 남편 만나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만 해요. 막내는 엄마가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아빠에게 당하는 엄마 모습만 봐 왔으니 말이에요. 저는 그냥 세 딸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해요. 또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능력 있는 여자가 되라는 것이에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됐으면 하죠. 제 어머니도 제게 공부하는 여자, 돈 버는 여자, 행복한 여자가 되길 바라셨는데 저도 마찬가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