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복·모스크바 특파원

지난 5일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현대자동차가 4억 달러를 투자해 짓는 러시아 공장 기공식이 열렸다. 러시아 언론들은 대체로 "현대차가 공장을 건설하는 현지화(現地化) 전략을 통해 러시아 시장에서 재도약하려 한다"며 호의적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러시아 딜러들, 재계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 "현대차의 높은 브랜드 이미지에 비해, 어딘가 부족함이 있었다"고 당시 기공식을 평가한다. 행사 참석자의 중량감이 예상보다 떨어진 점을 말하는 것이다.

당초 기공식에 참석하려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배임 등의 혐의로 법원이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하자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자 참석을 약속했던 이고리 세친 부총리, 엘비라 나비울리나 경제개발 장관, 빅토르 흐리스텐코 산업장관 등 러시아 정부의 핵심관리들이 줄줄이 불참을 통고했다. 세친 부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다. 두 장관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의 측근들로, 러시아 경제를 주무르는 기관들의 수장이다.

'러시아 인사들의 참석이 뭐 그리 중요하냐'라는 반박이 나올 법하지만 러시아 상황은 특수하다. 푸틴 총리측의 지원은 러시아 사업의 성공에 필수적이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좋은 예다.

도요타는 2005년 6월, 1억4000만 달러를 투자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장 기공식을 했다. 다른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와 투자규모 등에서 차이가 없는데도 도요타 공장 기공식은 러시아 안팎의 화제를 모았다. 러시아에서 푸틴 당시 대통령, 일본에서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러 전문가위원장(전 총리) 등 양국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푸틴과 모리는 작년 12월 이 공장 준공식 때도 나란히 모습을 나타냈다.

도요타에 대한 푸틴의 각별한 애정은 러시아 수입차 판매시장에서 현대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5위권에 머물던 도요타를 곧바로 1~2위권에 올려놓았다. 2004~2005년 2년 연속 판매 1위를 기록했던 현대차는 2006~2007년에는 도요타 등에 밀려 3~4위권으로 내려앉았다. 러시아 컨설팅사 관계자들은 "도요타에 대한 푸틴의 관심이 러시아 소비자들에게 '도요타는 믿을 만한 차'라는 인식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푸틴은 왜 지나칠 만큼 도요타에 관심을 쏟은 것일까. 러시아 재계 인사들은 일본 정부의 적극적 태도가 답이라고 말한다. 일본 총리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그런 자리를 역임하고 현재 러시아 관련 단체장인 고위 인사를 파견해 '도요타는 일본 정부가 후원해 러시아에 투자하는 만큼 러시아도 상응하는 예우를 해달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뿐 아니다. 미국 포드나 독일 폴크스바겐의 러시아 공장 기공식 때도 회사 대표는 물론 그 나라 고위 관료들이 늘 왔고, 러시아 경제관료들도 참석했다. 이후 두 회사 차량의 판매고는 성장세를 보였다.

어떤 기업이 러시아에 투자하고 이익을 얻었다면 기업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에는 국부(國富)로 연결된다. 정 회장의 기공식 불참이 문제의 단초를 제공했지만, 우리 기업의 대규모 투자 행사에 고위 관료 한 명 보내지 않는 정부의 무신경도 되짚어 볼 대목이다.

러시아 크렘린(대통령궁)은 "만일 공장 기공식에 한국에서 대통령 특사를 보낸다면 우리 정부 최고위층이 기공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서한까지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가 그래서 더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