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법관(法官)은 수사기관인 의금부·형조·한성부·사헌부 소속 관리였다. 반면 법을 판정하는 일은 잡과(雜科) 출신의 율관(律官)이 맡았다. 율관들의 소속 부서가 사율원(司律院)인데, 조선 초에는 율학(律學)이었다가 세종 16년(1434) 형조의 건의에 따라 사율원으로 개칭했고, 세조 12년(1466) 다시 율학(律學)으로 돌아갔다. 사율원은 의금부 같은 수사기관에서 수사기록인 문부(文簿)를 보내오면 '경국대전(經國大典)' '대명률(大明律)' '율학해이' 등의 법률서와 조율(照律:죄를 법률과 대조하는 일)해 형벌을 논단(論斷)했다.

삼권이 분립된 현재의 관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율원의 지위가 대단히 낮았다는 점이다. 조선은 장관(長官)의 직급에 따라 관청의 품계도 정해지는데 수사기관인 의금부는 종1품, 형조·한성부는 정2품, 사헌부는 종2품 관청이었다. 사율원은 종8품 아문(衙門)으로서 대궐 후원의 꽃과 과실을 관리하는 장원서(掌苑署)의 정6품보다도 훨씬 낮았다. 종1품 판사(判事)가 장관인 의금부에 대해 '경국대전' 이전(吏典)은 "임금의 명을 받아 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판결기관이 아니라 수사기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종 10년(1479) 형조에서 "율학(사율원)이 나라의 형률(刑律)을 맡아 무릇 입법이나 조장(條章:법규)에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대로 법률 판단은 사율원 관할이었다. 사율원이 품계가 낮다고 그 판결을 수사기관이 바꿀 수는 없었다. 사욕(私慾)이 개재되었다는 의심을 받기 때문이었다. 사율원은 품계가 낮았기에 해당 법조문을 기계적으로 적용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형벌이 달라지는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논란이 드물었다. 감형은 오직 임금의 권한이었는데, 이때도 그 사유가 분명해야 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분석에 따르면 법원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서 관대하다는 통설이 통계로 입증되었다. 재량권의 남용이란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는데 낮은 품계의 사율원에 법률 상각(헤아려서 결정함)을 맡긴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