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현 이화여대 교수

김수영은 체 게바라가 아니다. 베레모 아래로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모터사이클을 타는 좌파 게릴라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그에게서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러닝 셔츠'가 아닌 '란닝구' 바람으로 퀭한 눈빛을 보여주는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에 더 익숙하다. 그런데도 그는 체 게바라처럼 혁명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김수영도 그런 김수영이 되고 싶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김수영이 혁명을 거부했다는 말이 아니다. 혁명가이기를 열망하는 것만큼 소시민임을 자인하는 것도 현대적임을 보여준 문제적 시인이 바로 김수영임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는 "자본주의보다도 처와 출판업자가 더욱 싫다"거나 "마비되어 있지 않다는 자신에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며 안일한 일상과 사투를 벌인 진정한 자유주의자다.

올해가 김수영 40주기다. 그에 의하면 "우리집 여편네의 경우를 보니까 여자는 한 40이 되니까 본색이 드러난다." 그에게 '여편네'란 가장 사랑하는 적(敵)이고, 맞서 싸워야 할 자신의 치부이자 일부이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그의 '본색'을 파악하기에 아주 적당한 때일 수 있다. 불온해질 때가 된 것이다.

때맞춰 김수영이 사망한 1968년 이후 출생한 40명의 후배 "김수영들"이 "그의 시는 영원한 현재"라며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라는 기념시집을 출간했다. 편자이자 시인인 서동욱에 의하면 "40년 동안 놀랍고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 거목을 이룬" "거대한 뿌리들의 이야기"가 그 책에 담겨 있다. "나는 그에게 깊이 빠지지 않는다"(김이듬)거나 "다 해먹고 토끼셨구나"(김민정)라는 발랄한 반동에서부터 "김수영이라는 상처"(이장욱)에 대한 경배까지 그 스펙트럼도 넓다.

무엇보다도 시사적인 것은 지금의 시대가 김수영처럼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라고 외치면 "왕년에 기침깨나 했었다"로 되받아치면서 기침조차 알리바이로 삼는 때라는 점이다. 이렇게 기침이 "아무런 징후가 아닌 시대"이기에 더욱더 김수영이라는 존재가 현재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진은영)이다.

만약 김수영이 소위 '명박산성' 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다면 그는 뭐라고 했을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무서운 기색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처럼, 스스로 도는 '팽이'처럼, 그에게 촛불은 관념적인 은유가 아니라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래서 촛불이 촛불을 부르는 현장에 그도 동참했을 것이다.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촛불 시위가 '참을 수 없는 순정'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시위꾼들의 '전략'이 포착되었다고도 한다. 중심이 부재한다고 걱정하는 반면 중심이 다변화되었다고 긍정적으로도 평가한다. 전자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지만 디지털 포퓰리즘의 위험성도 크다고 우려한다. 최루탄 대신 물대포가 있는 축제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수영에게도 촛불은 태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촛불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래서 '눈'처럼 살아있기가 오히려 쉽다. 얼마 전 윤활유가 칠해진 컨테이너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끌 수도 있어야 진짜 촛불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촛불로 하나가 되었다는 만족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안에 존재하는 차이와 두려움까지 보살피는 일이다. 그것이 그림자 없는 태양을 사랑한 혁명가로서뿐 아니라 비겁함과 옹졸함을 지닌 소시민적 시인으로서의 김수영까지도 사랑하는 방법이다. 스스로가 적일 때의 촛불이 가장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