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에서 기르는 한우(韓牛)를 벽창우(壁昌牛)라고 한다. 이 소는 힘이 좋고 고집이 세다. 강영훈(姜英勳·87) 전(前) 국무총리의 고향이 평북 창성이다. 지기(地氣)를 이어받았는지 세상은 그를 벽창우처럼 원칙을 지키는 인물이라 평한다.

그는 1950년 9·28 서울수복(收復) 때부터 서울 서대문구 경기대 근처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승용차로 5분 거리가 광화문이다. '촛불의 광장'이 있는 곳이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 달 새 '미국산 광우(狂牛)를 먹기 싫다'는 구호가 '정권 타도'로 바뀌었다.

얼마 전 강 전 총리는 회고록을 냈다.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라는 제목이다. 그 책에는 영변농업학교에서 일본 히로시마 다카타(高田)중, 만주 건국대를 거쳐 해방 후 군문(軍門)에 들어선 그의 젊은 시절과 4·19, 5·16, 1990년대 노사분규에 얽힌 일화가 들어 있다.

'인간 벽창우'를 만나기 위해 연락하니 장남 강성룡(姜成龍·60) 변호사가 조심스러워했다. 연로(年老)해 인터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강 전 총리를 만나 "나라의 어른께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인사를 할 때까지 강 변호사의 말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강영훈 전 총리의 서재에는 태극기가 걸려있다. 한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아온 그는 최근‘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태극기 걸린 2층 서재에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단정히 앉아있던 강 전 총리는 그 말에 껄껄거렸다. "내가 나라의 어른이라는 얘기를 처음 듣는다"는 것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원로가 첫인사를 농담으로 받아친 것이다. 기자는 강 전 총리 큰아들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미국산 쇠고기 사태는 알고 계시지요.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릴 것을 우려해 거리로 나섰다는 소식은 진작에 들었습니다."

―광화문과 서울시청에서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40일을 넘었습니다.

"광우병을 염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이번 사태는 자초자화(自招自禍)한 면이 있어요. 국민들이 그렇게 걱정한다면 정부가 미국과 재협상을 해야겠지요. 재협상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요. 정부가 국민들의 요구에 따르는 게 순리죠."

강 전 총리가 장남인 강성룡 변호사의 부축을 받고 자택 정원을 걷고 있다. 강 변호사는 아버지의 건강이 약해지자 9년 전 본가로 이사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미국과 재협상을 할 수 있으면 이번 사태가 끝났겠지요.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입니다만.

"사태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런데 국민들이 반대하는 협상을 한 관계자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사과했지만 관계부처 공무원들 중에는 '잘못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일손까지 놓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말이 안 되지요.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잘못했다고 그렇게 비판하는데 공무원들이 뒤로 숨어 일신(一身)만 돌보겠다는 자세라면 크게 잘못된 겁니다. 국민들을 설득하는 한편 당연히 책임을 물을 건 어떤 형태로든 물어야지요."

―공무원들이 이번 사태에서 다 숨어 버린다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국가의 기강(紀綱)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국가도 어떤 형태로든 기강이 확립돼야 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이런 사태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측했다면 초기에 반대를 했어야지요. 뭔가가 두려워 반대를 못했거나 이런 사태를 예측 못 하는 과오를 저질렀다면 다 그만둬야지요. 그게 공직자의 자세입니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을 넘겼는데 역대 보기 힘든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정부가 난관을 극복하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기본적으로 정부는 자기만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국민 생각이 바로 여론 아닙니까. 여론에 따라서 나라를 이끌어 가야죠. 내 생각만이 민주주의요, 내 생각만 옳다고 해서 혼자 이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오산입니다."

강 전 총리가 주영(駐英)대사 시절, 대사관 직원 한 명이 공금을 횡령하고 미국으로 도주해 귀국명령에 불복한 사건이 일어났다. 강 전 총리는 "부하 직원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했다"며 자진해 당시 이원경(李源京) 외무부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총리로 있던 1990년 7월에는 당시 야당 평민당이 "여당 총재가 서울시 방위산업 정보비를 여당 격려금 조로 불법 사용했다"고 폭로한 적이 있었다. 조사결과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나 여야는 국회 정상화를 빌미로, 그에게 '총리사과문'을 요구했다.

강 전 총리는 "불법 아닌 것을 어떻게 잘못했다고 사과할 수 있느냐"고 버텼다. 그런 그를 당시 박준규(朴浚圭) 국회의장이 "총리가 정치를 몰라 그런다"며 타박했다. 강 전 총리는 마지못해 사과문을 읽었다. 그 즉시 그는 청와대에 사표를 냈다. 사표는 반려됐지만 그 후 강 전 총리는 사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언제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이었다.

―촛불집회 사태에 해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는 개각도 하고 청와대 진용도 개편한다지만 국민들이 집회를 계속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민들이 각자 다 생각이 있어서 나라의 정치 방향을 가지고 뭔가를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애국심이 있다는 방증이지요. 그렇지만 애국심만 있다고 해서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 저는 상당히 의문이 듭니다. 사회 전체가 떠들고 주먹질하고 이러는 게 아니고 각종 생활에서의 (국회 같은) 조직체를 통해서 하는 게 좋겠지요."

―애국심과 함께 다른 무엇도 필요하다는 말씀인가요.

"애국심을 나타내는 건 좋지만 그저 사회 전체가 깃발 들고 나와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민족이 잘되려면 각자의 의견을 종합하고 하나로 모아야지요. 그래야 집중이 될 것 아닙니까?"

―촛불집회가 나라를 편 가르는 식으로 발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이야기만 옳다고 해서 싸움질만 하고 그러면 독재가 나오든지 독재하는 체제에 끌려갈 위험성이 있지요. 우리 민족이 워낙 영리한 민족이니까 고난을 넘고 넘어 여기까지 왔으니까 쉽사리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요."

―강 전 총리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또 최근 사태를 보면서 우리 역사가 격동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19, 5·16, 유신체제에 광주민주화 운동, 1987년의 6·10항쟁처럼 고비가 많지 않습니까. 격동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이 독립한 게 60년을 갓 넘었지요. 과거에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확립될 때까지 시련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자기 의견도 내고 다른 사람 의견도 듣고 해서 공통적인 의견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도 자기주장만 민주주의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민주주의 사회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방증(傍證)입니다."

―요즘에는 인터넷 여론을 사람들이 두려워해 원칙을 말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웃으며) 저는 정치도 모르고 정치해 본 지도 오래된 사람입니다. 제가 괜히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나라가 빨리 민주화된 선진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교(儒敎)적인 배경에 일본의 식민지 속국(屬國)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민주주의가 미진한 것이지만 우리 민족이 너무 현명한 나머지 그저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런 측면도 있거든요. 민주적인 사회기반이 확립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 전 총리가 국론에 분열이 일어나면 독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체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그는 4·19 이후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데 대해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5·16이 일어날 때까지 우리의 민주헌정 경험은 13년에 불과했다. 그 기간에는 민주정치와 거리가 먼 한국전쟁 기간 3년이 포함돼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정치 구호에 익숙해졌는지 몰라도 의식은 민주정치 체제 역시 왕조현군(王朝賢君)의 도(道)에 불과했다. 소나무 뿌리에 대나무를 이식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육사생도 5·16 지지 행진 거부…  '반혁명 분자 1호'로 강제예편돼

이런 분석에도 불구하고 강 전 총리는 5·16에 부정적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주도 세력이 요구한 육사생도의 혁명 지지 거리행진을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그는 거부했다. 그는 '반혁명 분자 1호'가 돼 구속된 후 강제 예편서에 도장을 찍고 군복을 벗어야 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1917년생)이 나이는 많지만 군 위계상 부하(강 전 총리는 당시 중장)인데, 기가 찬 일을 당해 억울하지는 않았나요.

"억울하기는요, 마음이 편했죠. 언제 구속되나 하고 조마조마하게 있는 것보다는 구속 1호가 되는 게 낫죠."

―박 전 대통령과 같이 근무한 적은 있나요.

"같이 근무한 적은 없었어요."

―박 전 대통령이 나중에 사과하던가요.

"한참 후에야 '일을 하다 보니까 (교도소에 보내고)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진심이 담긴 사과라고 보시나요.

"제가 (진심인지 형식적인 것인지) 그것을 일일이 따질 일은 없죠."

―당시 철기 이범석 장군의 족청계(族靑系·민족청년단)로 분류돼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지요.

"저는 당시 족청계의 대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범석 장군이 독립 운동할 때 내 처갓집이 만주에 있었어요. 그때부터 알고 지냈지요. 제가 이 장군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할 때 비서실장을 한 적도 있지요. 그러니 오해들을 했겠지요."

―이기붕(李起鵬) 전 부통령과 관련해 오해를 받은 적도 있지요.

"그분이 전에 저를 많이 보살펴줬으니까요. (아들 강 변호사가 '아버님은 이기붕씨에게 신세 진 게 없다고 하자) 신세 진 것이 왜 없어. 4·19 직후 이 전 부통령이 갈 곳이 없어 제가 사령관으로 있던 곳에서 잠시 지내게 한 적이 있어요."

―쉽지 않은 결정인데요.

"영락(零落)했다고 저까지 외면해서는 인간 된 도리가 아니죠. 제가 잠시 원주에 출장 간 동안 당시 제 참모들이 이 전 부통령에게 '사령관님 입장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달라'고 했나봐요. 이 전 부통령이 그 길로 서울로 갔는데 다음 날 일가가 자살했지요."

―당시 한 신문이 '강영훈 장군이 이기붕씨를 서울로 돌려보내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식의 기사를 썼죠? 그런 오해에 대해 왜 적극 해명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당하면 되는 거지요. 해명한다고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요즘의 상황을 4·19 직후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혼란이 계속되면 엉뚱한 세력들이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지금과 그때는 다르지요. 당시는 군인들이 나오기 전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민족의 나갈 길을 가지고 의논도 하고 민심을 다독였어야 했는데 아무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니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고 그렇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나라는 비슷한 역사가 10년, 20년마다 계속 되풀이되는지 안타깝습니다.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되는 것은 아니지요. 국민들도 공론(公論)을 중시해야 하고 지도자들도 아주 신중하게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국민들은 公論을 중시해야하고 지도자들은 신중히 역할 수행을

―총리를 마친 이후 들어선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주제넘게 그간의 정권을 평가할 수는 없고요, 우리나라가 민주화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건데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 건 사실이지요. 제가 천주교 신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은 하느님께서 운명을 통해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의 모범국가가 되라고 하는 사명(使命)의식을 부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강 전 총리는 손자, 증손자들에게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가르쳐주고 싶어 회고록을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목표가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준 선생님과 친구의 은공을 알리자'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제가 소위 벽창우라는 말을 듣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까지 살게 된 이면에는 저를 가르쳐준 분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회고록 쓰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됐으니까요."

강 전 총리의 아들은 "아버지가 워낙 소식(小食)을 하는데 요즘은 더 식사량이 줄어들었다"고 걱정했다. 그는 원래 분가(分家)해 살았지만 부모의 건강이 고령으로 나빠지자 9년 전부터 서대문 본가에서 살고 있다.

강 전 총리는 요즘 외부 일정을 제외하면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동네 뒷산을 올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어려워졌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강 전 총리와 사진촬영을 위해 정원으로 나가자 와병(臥病) 중인 아내 김효수 여사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 강 전 총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젊은 시절 나 때문에 고생하다 요즘 많이 아파 돌봐주고 있다"며 옆에 털썩 앉더니 그네를 흔들었다. 노(老) 아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강 전 총리는 동행했던 사진부 최순호 기자에게 "인터뷰 사진만 찍지 말고 아내와 한 장 부탁해도 되겠느냐"고 했다. 고요한 정원에 최 기자가 눌러대는 철컥철컥하는 셔터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공간을 빠져나와 기자는 다시 넘실대는 촛불의 해일(海溢) 속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