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에 대해 학계와 연구기관들의 관심이 뜨겁다. 그 덕분에 이번 주 '최초 태극기'의 제정과 관련된 여러 의문들이 해결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처음으로 태극기를 창안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1882년 9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朴泳孝·1861 ~1939)가 아니라, 이보다 4개월 앞선 1882년 5월 조미(朝美) 조약 체결 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李應浚)이었음이 새로 밝혀졌다.

지난 27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한시준) 주최로 서울 대우재단빌딩에서 열린 '국기 원형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는 한철호 동국대 교수가 논문을 발표했고,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토론문을 보냈다. 국내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이들은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4시간 넘게 격론을 이어 간 끝에 태극기의 창안과 제정 과정에 대해 사실상의 결론을 내렸다. 태극기의 창안자는 이응준이었으며,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공식 제정했다는 것이다.

◆조미조약 당시 첫 태극기 게양

1882년 5월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5월 14일(이하 양력),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명했고, 이응준은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다. 이 '국기'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 하지만 이 국기의 형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괘가 없는 태극기'(김원모)나 '팔괘 태극기'(이태진)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이응준 태극기'는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됐다. 조미조약 체결 2개월 뒤인 7월 19일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 항해국이 제작한 문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에 태극과 4괘를 갖춘 태극기가 실렸음이 밝혀진 것이다〈본지 2004년 1월 27일자 A11·22면 보도〉. 지금의 태극기와 4괘의 좌·우가 바뀌었고 태극 모양이 약간 다를 뿐 전체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김원모·이태진·한철호 교수 모두 이것이 조미조약 체결 당시 걸렸던 '이응준 태극기'라는 데 동의했다. 이 태극기에 대해 김원모 교수는 "최초의 국기이자 태극기"라고 평가했다. 한철호 교수는 "임진왜란 때도 이미 태극 모양의 깃발이 존재했고 조미조약 당시는 아직 공식 국기를 제정하기 전이었으므로, 최초의 태극기가 아니라 '국기의 원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극기'를 통념대로 '태극과 4괘를 갖춘 깃발'로 규정하는 한, 이 깃발은 사실상의 국기로 쓰인 현존 최고(最古)의 태극기임이 분명하다.

◆박영효, 4괘 위치 바꿔 공식 제정

그렇다면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선상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어떻게 된 것인가? 박영효의 일기인 《사화기략(使和記略)》에는 그가 준비해 간 '태극팔괘도'를 본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가 '너무 복잡해서 식별이 어렵다'는 의견을 내 '팔괘도'에서 괘 네 개를 뺀 '사괘도'로 고쳤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한철호 교수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조미조약 당시 청나라 특사 마건충(馬建忠)은 '이응준의 깃발(태극사괘도)이 일본 국기와 혼동된다'며 태극 주변에 팔괘를 그린 그림을 새 국기로 제안했다. 청나라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기 어려웠던 박영효는 제임스의 의견을 구실로 자연스럽게 '마건충 안'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태진 교수도 "제임스 선장의 역할은 '사괘도'와 '팔괘도' 중에서 '사괘도'를 택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효가 이 국기를 만든 것은 9월 25일이었고, 일본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것은 12월 27일이었다. 이 국기의 모습 역시 수많은 설이 있었지만, 한철호 교수는 최근 발굴된 문서에서 그 형태가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 태극기는 11월 1일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수록된 것으로, 박영효가 국기 제정 직후 일본에 체류할 당시의 태극기라는 것이다.

이 태극기에 대해 한철호 교수는 "박영효 태극기가 분명하다"고 했고 이태진 교수도 동의했지만 김원모 교수는 "방증자료일 뿐 박영효 태극기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태극기가 1883년 3월 6일 조선 정부가 국기 제정을 공식 반포한 직후인 3월 18일 청나라 문서 《통상장정성안휘편》 에 실린 '대청국속 고려국기(大淸國屬高麗國旗)'와 비슷한 형태인 것은 분명하다. '요시다 문서'의 태극기가 '박영효 태극기'가 맞다면, 박영효의 역할은 ▲ '이응준 태극기'를 모본으로 삼아 국기를 제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괘(卦)의 좌·우를 바꾼 것이 된다. 그러나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서 역사에 이름이 남은 것은 중인 신분의 역관 이응준이 아니라 철종 임금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였다.

◆다른 태극기들은…

지난 1997년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1882년 10월 2일자에 실린 '조선국기' 그림이 발굴된 뒤, 한때 이 태극기가 '박영효 태극기'란 설이 불거졌었다. 이 태극기의 4괘는 지금의 태극기와 3괘가 달라 논란이 일었다. 당시 김원모 교수가 "일본측이 날조한 그림"이라고 주장한 반면 이태진 교수는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이 교수는 이번 토론문에서 자신의 기존 해석을 수정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잘못 그린 태극기'라는 것이다.

또 《통상장정성안휘편》의 태극기에 대해서 김원모 교수는 "반포 당시의 태극기 원형이 맞다"고 한 반면, 이태진·한철호 교수는 "바탕이 황색이고 태극 안에 작은 원이 있는 등 청나라측이 일부 왜곡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기의 명칭 앞에 멋대로 '대청국속'이란 말을 붙이는 등의 조작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보였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