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고고오디오 대표

새 동네로 이사 오면 짐 풀어놓고 어슬렁거리며 동네 지형도를 그리는 게 나의 버릇이다. 괜찮은 밥집과 술집이 있나 하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그러다가 눈에 쏙 들어온 집이 있었다. 용산역 근처의 옥호(屋號)도 없는 작은 술집이다. 서울 한가운데 저런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있나 싶었다. 덕소 가는 전철이 수시로 지나면서 운치를 더한다.

들어서니 낡은 전축에 올려놓은 LP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라? 이거 완전히 내 취향이잖아. 막걸리에 두부김치 시켜놓고 보니 테이블은 네댓 개, 동네 토박이 40대 순박한 부부가 주인이다. 자연스레 오디오에 눈이 갔다. 동네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주워왔다는 낡은 전축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노랫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아 늘 분통이 터졌다.

단골이 된 뒤에 말을 붙였다. "제가 전축장사를 하고 있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디오를 바꿔 드릴게요." 주인장 허락을 받고 우리 가게 단골들에게서 쓰지 않는 앰프와 스피커를 기부 받았다. 그렇게 모은 기기들을 CDP와 함께 장만해 드렸다. 주인 내외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소리가 이렇게 달라지네요. 처음 알았어요. 너무 좋네요."

억대의 오디오나 이 선술집 오디오나 그 하는 일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싼 오디오 시스템은 대개 한 사람을 위한 것인 데다 아무나 만질 수 없고, 선술집 시스템은 동네사람 누구나 DJ처럼 음반을 쓱쓱 닦아 틀고 함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몇 해 동안 수많은 오디오 시스템을 설치해 왔다. 그러나 내겐 바로 이 선술집 오디오가 그 중 가장 맛있고 따뜻한 소리를 내 준다. 누구든지 이 오디오로 음악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