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석 사회부 차장

육군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하던 중 유방암 수술을 받고 강제전역했다가 며칠 전 복직한 피우진 중령을 1년 반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국방부를 상대로 강제전역이 부당하다는 소송을 내려는 즈음이었다. 그는 수술로 신체 일부가 없다는 이유로 전역해야 하는 규정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때 소송에서 이겨 복직해도 계급정년 때문에 곧 전역해야 하는데 무슨 실효가 있겠냐고 했더니 "앞으로 계속 근무할 여군 후배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자기처럼 차별받는 여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군이 아니라 군인이고 싶다.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군인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피 중령은 소송을 낼 당시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수필집을 내고 여군들이 상관들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얘기를 쓰기도 했다. 당시 여군을 동료가 아니라 '장식용 꽃'으로 보는 군 내의 남성우월 현상을 비판하는 책 내용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지금의 군 내 상황이 피 중령의 주장과 꼭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거꾸로 여군이 몇 명 안 되기 때문에 조금만 돋보여도 금세 요직에 발탁되는 식의 상대적 이익을 본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여군의 숫자가 몇십 년간 전체 군의 1~2% 내외에 그치고 있는 걸 보면 여군이 여전히 '구색 갖추기용'에 머물고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다.

1996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군은 전체 병력대비 1.8%로, 대령 7명, 중령·소령 123명, 위관급 988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6년 현재 여군은 부사관을 포함해 전체 군 간부 정원의 2.6%인 4378명이다. 그간 준장 1명이 배출된 것이 큰 변화이고, 대령 9명, 중령·소령 248명, 위관급 2119명으로 수적으로 다소 증가했을 뿐이다. 그나마 여군들은 대부분 간호 병과로 특화돼 있다. 군 복무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 국방부 장관이 배출되는 유럽이나 중남미 국가들 상황은 이런 기준에서 보면 아직 먼 나라 이야기이다.

피 중령과 비슷한 시기에 암에 걸렸던 다른 고참 여군들의 사례도 여군의 처지가 어떤지 말해준다. 1997년 국내 첫 여성연대장이 됐던 엄옥순 대령과, 피 중령의 동기생인 양혜정 중령이 각각 2000년과 1999년 암에 걸려 유명을 달리했다. 이들은 사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살아남으려다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렸다는 것이 피 중령의 주장이다.

사실 군은 이번에 2심 소송에서 피 중령에게 패한 뒤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음으로써 과거와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군 인사법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면 군이 권위적이고 고루한 면을 많이 벗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비록 피 중령이 낸 소송의 영향이기는 했어도 신체등급 판정과 관계없이 본인이 원하면 계속 복무할 수 있게 규정을 고친 것만도 큰 진전이다.

그렇다면 피 중령이 앞으로 군 내에서 벌여야 할 여군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이 전혀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피 중령이 몇 년밖에 남지 않은 계급정년까지 뭘 얼마나 할 수 있겠냐고 회의(懷疑)할 일이 아니다. 당대에 해내지 못해도 길을 닦아 놓으면 한참 뒤라도 열매는 맺는 법이다. 차별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여군 지위향상의 상징으로서 향후 보여줄 피 중령의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