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호

요즘 부산 수영구 망미동 수영강변 일대에선 조용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낮고 작은 집들이 문화 공간으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다. 수영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센텀시티의 초고층 빌딩 숲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른바 '슬로 디스트릭트(Slow District)'. 말 그대로 느린 변화를 꿈꾸는 도시 프로젝트다.

디자이너 고성호(42·이인 대표·사진)씨. 부산을 대표하는 부산 토박이 디자이너인 고씨는 5년 전 '부산다운 개발'을 외치며 슬로 디스트릭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5년 동안 3단계에 걸쳐 망미동 일대 2만6640㎡ 면적의 마을에 있는 50여 채의 주택과 공장을 자연발생적인 문화 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지자체가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민간 차원의 프로젝트다. 20일 만난 고성호씨는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는 관공서 주도'라는 개념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나오시마(直島)를 예로 들었다. 나오시마는 일본의 어린이용 학습지 회사인 베네세사가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의뢰해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섬이다.

"요즘 지방엔 공공 디자인 바람을 타고, 디자인 지식이 전혀 없는 행정 담당자가 디자인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인력을 통해 도시가 개발되면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어요."

슬로 디스트릭트는 건축·디자인, 패션·아트, 푸드·컬처 등의 문화구역으로 나뉘어지고, 각 문화존엔 거점이 되는 대표 센터가 들어선다. 센터 외의 공간에 있는 가옥은 그대로 둬서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유입하는 지역을 만들 예정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장인들을 모을 예정입니다. 골목, 마당은 그대로 두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술을 느끼도록 할 겁니다."

망미동에선 '느리고 올바른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그지만, 첨단을 앞세운 현대적인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는 '부산의 타워팰리스'로 불리는 해운대 베네씨티의 디자인을 총괄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과거와 현대, 전통과 첨단의 조화가 중요한 거지요. 최첨단 도시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선 어느 골목에서 옛 추억을 맞닥뜨렸을 때의 기쁨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