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다음 달 미국과 북한 간에 초대형 외교 이벤트가 벌어진다. 미국은 20년 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풀어주게 된다. 북한은 그 대가로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 쇼를 준비 중이다.
'냉각탑 폭파'가 미북 간 핵 협상 진전을 의미하는 상징적 행위라면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한에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 줄 선물 보따리다.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면 북한에 대한 투자도 본격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문제는 철저히 미국과 북한 간에 논의되는 사안이다. 우리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이 미국을 통해 이 사안과 관련된 추이를 가늠하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북한을 테러지원국에 지정하게 된 유래를 알게 되면 정부의 이런 처신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된다.
북한에 '테러지원국'이란 딱지가 붙게 된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한국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북한이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등재된 날짜는 1988년 1월 20일이다. 1987년 11월 29일 북한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저질러 115명을 숨지게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이후 북한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지난 10년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과 관련해 북한에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은 채 테러지원국 해제를 지지해 왔다.
이런 입장은 보수주의를 내건 이명박 정부로 바뀐 후에도 여전하다.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20년이 넘은 일이라고 그냥 넘어가기엔 탑승객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수법이 너무도 끔찍한데 보수정권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미국의 보수파들이 북한이 저지른 KAL기 폭파사건과, 그 이후에도 북한이 테러에 개입한 흔적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테러지원국과 관련한 논란을 지켜보다 보면 이미 우리 사회에선 잊혀진 '최덕근' '이한영'이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조지프 리버먼(Lieberman·무소속)을 비롯한 미 상원의원 4명은 결의안을 제출했다. 미 국무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전에 북한이 취해야 할 조건을 담은 이 결의안에는 'Choi Duck-keun(최덕근)' 'Lee Han Young(이한영)'이 포함돼 있다. "북한이 1987년 KAL여객기 폭파, 199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생한 최덕근 영사 살해, 1997년 탈북자 이한영 암살 이후 어떠한 테러에도 연루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와 관련한 기록조차 찾기 어려워지는 마당에 두 사람의 이름을 영문으로 볼 때의 심정은 착잡하다. 최덕근 영사는 북한이 1996년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사살된 북한 군인에 대한 보복을 다짐한 후 피살됐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은 한국에 귀순했다가 97년 2월 총에 의해 타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북한이 테러지원국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는 것은 미북 관계와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한이 연루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듣지 못한 채 테러지원국 해제를 지지하는 것은 국가의 '국민보호 의무'와 관련,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