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보다 그 규모가 크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무차대회(無遮大會)다. 조선 성종 1년(1470) 광평대군의 부인 신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책이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인데, '수륙'과 '무차'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어 양자 사이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책의 '무차평등(無遮平等)'이란 말처럼 무차대회는 남녀노소, 귀천의 차별 없이 모든 백성들을 상대로 설법과 잔치를 베푸는 것이었다. 불교는 인연을 중시하지만 무차대회는 인연이 있거나 없거나를 가리지 않고 제도하는 법회였다. 그야말로 성범(聖凡)·도속(道俗)·귀천(貴賤)·상하(上下)의 구분 없이 불법과 재물을 베푸는 대법회였다.
그러나 무차대회도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성종 25년(1494) 성종의 친형 월산(月山)대군의 부인이 흥복사(興福寺=원각사)에서 무차대회를 열자 대간(臺諫)에서 연일 간쟁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명종 20년(1565) 4월 초파일 양주 회암사에서 거행하려던 무차대회는 사연이 깊다. 문정왕후는 명승 보우(普雨)와 함께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임란 때의 승장(僧將) 휴정(休靜:서산대사)·유정(惟政:사명대사)을 배출하는 등 유교국가 조선에서 불교 중흥에 힘쓴 왕비였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이 때문에 문정왕후를 여왕이라고 빈정댔다.
'명종실록'은 문정왕후가 베풀려던 무차대회 때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때의 무차대회는 거행되지 못했다. 문정왕후는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명종 18년(1563) 요절하자 그 뒤를 이을 손자를 기원하기 위해 무차대회를 준비한 것이었다.
'명종실록'이 '자전이 계율(戒律)을 따라 수십 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소식(素食:고기를 먹지 않는 것)하다가 병환이 났다'고 전하는 것처럼 지나친 정성이 병을 불렀던 것이다. 문정왕후의 승하로 무차대회는 무산되었으나 신분제 사회에서 모든 백성의 강복(降福)을 기원했던 무차대회의 정신은 현대 불교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