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뭍에서 헤매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 수륙재(水陸齋)인데, 유명한 불교도였던 중국 양(梁) 무제(武帝)가 시작했다. 남송(南宋)의 종감(宗鑒)이 1237년 편찬한 '석문정통(釋門正統)'에 따르면 양 무제가 용상(龍床) 위에서 선잠이 들었을 때 한 신승(神僧)이 나타나 "육도사생(六道四生)이 고통받고 있는데, 왜 수륙재를 열어 뭇 영혼을 널리 구제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한 것이 계기였다.
무제는 505년 강소성(江蘇省) 진강(鎭江)의 금산사(金山寺)에서 직접 수륙재를 주관했다. 불교국가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여러 차례 수륙재를 거행했는데, 유교국가 조선이 건국된 후 그 유풍을 존속시킨 곳은 뜻밖에도 왕실이었다. 태조는 재위 4년(1395) 현암사(見巖寺) 등에서 고려 왕씨들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고, 도성을 쌓다 죽은 역부(役夫)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도 열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津寬寺)를 아예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거행하는 사사(寺社)로 지정했다. 세종 14년(1432) 효령대군이 주관한 한강 수륙재는 유명했다. 무려 7일 동안 거행됐는데 승려 1000여 명과 길 가는 행인에게까지 모두 음식 대접을 하고 매일 백미(白米) 두어 섬을 한강의 물고기 먹이로 주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은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이 한강을 덮고,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서울 안의 선비와 부녀(婦女)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면서 양반의 부녀들도 음식을 장만해 공양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 판관(判官) 길사순(吉師舜)이 중지를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는데, 이처럼 왕실의 위호로 계속되던 수륙재는 중종반정 이후 국가 행사로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명종실록' 9년(1554)조에, "재상의 집에서도 몰래 수륙재를 지내 뒷날의 복을 빈다"는 기록처럼 민간에서는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 순조 때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에 면세전(免稅田)으로 '나라에서 행하는 수륙전(水陸田)'이 있는 것이 유교국가 조선에서 불교가 숨을 쉬었던 한 가닥 숨구멍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