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는 함께 자유를 쟁취하는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소? '신보(晨報)'의 근래 주장은 당신이 보기에 옳건 그르건 간에, 스스로 자유를 쟁취한다는 민중에 의해 불태워 버려져도 좋은 죄상이 있는 것은 아니오.'
1925년 12월 베이징대 교수 후스(胡適)는 옛 동료 천두슈(陳獨秀)에게 편지를 썼다. 그해 11월 군벌에 반대하는 베이징의 군중이 신문사를 습격, 방화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미 공산당 지도자가 돼 있던 천두슈는 군중들의 취지가 옳기 때문에 신문사 습격도 문제가 될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 후스의 생각은 달랐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쟁취할 자격이 없으며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소. 한 계급의 독재를 주장하는 당신들은 자유를 신봉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엊그제 중국 시위대의 폭력사태를 '변호'한 장위(姜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브리핑을 지켜보면서 문득 80여 년 전 천두슈와 후스의 논쟁이 떠올랐다. 장 대변인은 '선량한 중국 유학생들의 정의의 행동이었으며, 그들의 본의는 좋은 것이었으나 과격해져서 빚어진 것'이라고 했다.
취지가 정당하기 때문에 그 정도 폭력 사태(방법)는 별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가 한국 경찰과 기자가 부상을 입은 데 대한 유감은 표시했으나, 중국 측의 본심은 여전히 '취지는 옳고,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보는 것 같다. 목적이 옳으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공산당 선배 천두슈의 입장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셈이다.
20세기 중국 현대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앞세우던 후스가 아니라 폭력 혁명을 근본적 해결방안으로 제시한 혁명파에 의해 주도됐다. 1920년대 국공합작(國共合作)에 이은 국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문화대혁명까지 중국은 '혁명의 나라'였다. 혁명을 최고 가치로 떠받드는 사회에선 합리적 비판이 중지된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는 혁명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혁명은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혁명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3000만 명이 넘는 희생을 치른 것도 그중의 하나다.
개혁개방 이후 '혁명'은 '애국주의'로 대체된 것 같다. 자유나 인권은 여전히 부차적인 문제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도 여전하다. 지난 주말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올림픽 성화 봉송에 맞선 이유는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송환과 티베트 인권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 시위대는 이런 주장을 성화 봉송을 방해하는 행위로만 여겼을 뿐, 그들의 목소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폭언과 주먹질로 시민단체 회원들의 입을 막은 것은 '불관용'이라는 혁명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1950년대 반동 부르주아 학자로 몰렸던 후스는 1990년대 들어 중국 대륙에서만 연구서가 수십 종씩 쏟아질 만큼 주목받고 있다. 중국 학자들은 5·4운동의 유산이자 당대 중국에서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는 자유와 민주,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후스를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후스의 충고대로 중국이 자기와 다른 목소리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올여름 베이징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하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치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