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R&B만큼이나 잘못 알려진 장르가 일렉트로니카다. 로큰롤의 뿌리였던 R&B가 발라드 일색이 아니듯 일본 전자음악 '시부야계'가 일렉트로니카의 전부는 아니다.

정재형(36·사진)이 6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포 재클린(For Jacqueline)'은 일렉트로니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교본(敎本)적 음반이다. 그는 한양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공부하고 트리오 '베이시스'로 등장해 상큼한 충격을 줬었다. 다시 파리에서 클래식과 영화음악 작곡을 공부한 뒤 내놓은 이번 음반은 기존 일렉트로니카와 많이 다르다. 틀을 부수지는 않았다. 틀을 해체한 뒤 전혀 다른 재질의 못을 박아 재조립했다.

"정재형 하면 베이시스를 먼저 생각하고 오케스트라 음악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이번엔 전자음들을 오케스트라처럼 활용해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만난 정재형은 "미니멀하게 들리는 곡이 많지만 주의 깊게 들으면 숨은 디테일들의 총합"이라고 했다.

거의 모든 곡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찌직' 하는 노이즈와 장난감 멜로디카 같은 소리들이 첼로와 트럼펫에 섞여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런 작업은 현대 미술과 비슷한 것 같아요. 뒤샹이 소변기를 뉘어 놓고 '샘'이라고 제목을 붙였을 때 다들 '저게 무슨 아트야?' 했었잖아요. 노이즈를 음악적으로 배치하고 풀어내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첫 곡 '지붕 위의 고양이'는 밝은 보사노바 리듬 위에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인 롤러코스터의 이상순이 기타를 얹고, 그 사운드 위에 갖가지 노이즈와 사운드가 켜켜이 쌓았다. 맨 꼭대기엔 모델 장윤주와 정재형의 보컬이 있는데, 장윤주의 음색과 곡 소화력이 깜짝 놀랄 만하다. 그녀는 이 노래에서 활짝 갠 토요일 아침 같은 느낌을 준다. 정재형은 "윤주는 요 몇년 새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음악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정재형은 유학을 떠난 이유에 대해 "내가 소진되는 느낌이었고 징글징글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뻔하게 가야 하나, 40대가 되면 어떻게 될지 답답했어요." 1999년 떠난 유학은 8년 만인 작년에 끝났다.

그의 신작들은 대개 차분히 앉아 감상할 곡들이다. 피아노와 첼로가 느리게 교차하는 프랑스어 노래 '롱그 디스탕스(Longue Distance)'는 공포영화에 삽입하면 어울릴 듯. 80년대 운동권이었던 형(그의 형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이 법정에 섰던 모습을 떠올리며 쓴 노래 '1988'은 피아노 한 음으로 네 박자를 끌고 가는 미니멀한 음악이다.

그는 "거대하고 웅장한 음악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다"고 했다. "이걸 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음악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