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공포'가 몰려오고 있다. 아이들의 젖병이나 장난감, 음식·음료수 용기 등 일상 생활에 널려있는 플라스틱에 암을 유발하거나 인체 내분비계를 교란할 가능성이 있는 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미 보건당국이 처음 인정했다.
주범은 플라스틱을 만들 때 쓰이는 '비스페놀A(BPA)'란 이름의 환경호르몬 물질이다. 그간 국제학계에선 이 BPA의 위험성을 강력 경고했지만, 미 보건당국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아왔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 정부도 국내 시판되는 일부 젖병에서 BPA가 검출되는 사실을 처음 확인,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
◆캐나다는 이미 규제에 착수
BPA에 대한 위험성을 미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미 국립보건연구소 산하 국립독극물프로그램(NTP)이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서다.
이 보고서는 실험용 동물들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낮은 수준의 BPA에 노출된 동물들이 성장과정에서 행동의 변화와 함께 전립선과 유선(乳腺)에서의 종양 발생 가능성, 암컷의 사춘기 시기 변화 등이 관찰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현재의 BPA 노출 수준에서도 태아·유아·어린이들의 신경계와 관련된 행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조사내용을 16일 보도한 미 워싱턴포스트(WP)는 "국립독극물프로그램이 BPA의 암 유발 가능성에 대해 5등급 중 3등급인 '다소 우려(some concern)'로 평가했다"며 "일상적인 플라스틱 제품에 함유된 BPA가 암이나 심각한 장애를 일으킬 수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전했다.
BPA는 1950년대부터 플라스틱 제품 제조에 널리 사용돼 온 화학물질로, 플라스틱뿐 아니라 콤팩트 디스크, 식품저장용 캔 내부 등을 만들 때도 주로 쓰인다. 6세 이상의 미국인 93%의 소변에서 BPA가 검출될 정도로 이미 일상 생활 깊숙이 침투한 상태라는 별도의 조사보고도 있다.
플라스틱에는 재질에 따라 BPA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환경호르몬도 들어있다. 플라스틱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데 쓰이는 DEHP를 비롯해, DINP, DEHA, DBP 같은 화학물질이다. 국립독성연구원 이영자 용기포장과장은 "이 가운데 BPA가 들어있는 플라스틱은 전자레인지 밀폐 용기나 젖병, 장난감 등 딱딱하고 투명한 PC(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플라스틱 제품"이라고 말했다.
BPA의 인체 유해성은 미국에서 지난 수년간 논란거리였다. 미 의회와 시민단체들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BPA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관계 당국인 미 식품의약국(FDA)은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규제에 부정적이었다.
FDA는 지난 3월 BPA의 안전성을 경고한 정부·학계의 연구 결과 수백 건을 무시하고, 화학공업 업계가 지원한 2건의 연구결과만을 근거로 안전하다고 판정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WP는 "국립독극물프로그램의 이번 보고서로 연방정부의 입장에 변화의 전기(轉機)가 마련됐다"고 전했다.
캐나다 보건당국은 이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가, BPA에 대한 규제에 공식 착수했다. 16일 캐나다 일간 '글로브 앤 메일'은 "캐나다 연방보건부가 BPA를 위험물질로 명시, 독성 화학물질로 분류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캐나다에서는 앞으로 BPA의 사용을 금지하는 특별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내 젖병에서도 BPA 검출
국내 학계와 시민단체 등도 그간 BPA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다. 장난감과 젖병, 통조림 내부 코팅물질 등에 BPA가 함유돼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가운데 이번엔 국내 시판 중인 일부 젖병에서 BPA가 검출되는 사실이 정부 차원에서 처음 확인됐다.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은 16일 "플라스틱 젖병에 든 BPA가 유아들의 몸 속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환경과학원은 작년 한 해 동안, 시판 중인 유아용 젖병 6개 제품을 구입해 ▲끓인 물을 젖병에 넣은 뒤 흔들거나 ▲젖병에 찬물을 넣어 전자레인지에서 가열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5개 제품은 BPA가 검출되지 않았지만, 1개 제품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BPA가 검출됐다. 성균관대 이병무 교수(약대)는 "비록 검출된 양이 적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젖병을 사용하다 몸 속으로 들어가면 방어력이 취약한 아이들에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유아용품에 대한 BPA 검출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인 '다음을 지키는 사람들'의 박명숙 국장은 "BPA를 비롯한 환경호르몬은 냄새와 색깔이 없어 어디에서 얼마나 나오는지 모른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환경호르몬이란
사람의 내분비계를 교란시켜 남성 불임과 여성의 유방암, 성(性) 조숙증, 신생아 기형 같은 생식기능에 주로 장애를 일으킨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 환경보호청(EPA) 등은 다이옥신과 살충제인 DDT, 납, 수은, 카드뮴 같은 중금속 그리고 농약 성분 등 67~143종의 화학물질을 환경호르몬으로 규정하고 있다. 플라스틱 제품뿐 아니라 TV나 컴퓨터 같은 가전제품 외장재나 카펫 같은 실내용품 등에도 환경호르몬이 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