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호 논설위원

총선후보들 못지않게 총선일(9일)을 손꼽아 온 이는 아마도 대통령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취임 이후 지난 45일은 참으로 어정쩡한 시기였다. 집권을 하고서도 곧바로 이어진 총선 탓에 이 눈치 보고 이 말하고 저 눈치 보고 저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마침내 그런 선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대통령으로선 그동안 참았던 말과 정책들을 하루라도 빨리 쏟아내고 싶을 것이다. 청와대와 내각엔 이미 '이명박 색채'가 진한 정책들이, 마치 개봉일만 기다리는 영화들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생각해볼 일이다. 이명박시대를 연 진정한 민심은 무엇인가. 앞서 이 대통령에게 530만표 차의 압승을 안겨준 '12·19 민심'이 있다. 지난 정권들의 적폐를 바로잡고 새 시대를 열어달라는 주문이 담긴 민심이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4·9 민심'은 그런 일편단심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기대와 다르면 언제든 회초리를 들겠다는 경고음이 섞여 있다.

앞으로 2년 동안엔 큰 선거가 없다. 오로지 국정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다. 이런 황금기가, 그것도 집권 초에 주어진 건 이 대통령으로선 더이상 좋을 수 없는 기회이다. 이런 호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앞날이 갈린다.

여권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일제히 밀어붙일 태세이다. 소신껏 밀어붙일 일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12·19 민심'이다. 그러나 밀어붙일 일과 그래선 안되는 일을 제대로 가려서 하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총선과정에서 드러난 민심이다.

이번 총선에서 이명박 사람들은 당락 여부를 떠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예전엔 정권의 실력자라고 하면 선거에서 득점요인이었는데 이번엔 거꾸로였다. 그것도 한나라당의 텃밭이라는 영남에서조차 그랬다. 정권을 향한 이보다 강렬한 경고음이 또 있을까.

이 대통령은 올해를 대한민국 선진화의 원년으로 선언했다. 선진국이 되려면 연 개인 소득을 3만~4만 달러로 올려야 한다. 그러나 돈을 번다고 저절로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니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선진국 소리를 듣지 못한다. 경제와 함께 다른 모든 분야에서 업그레이드가 이뤄져야 한다. 만약 그동안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그런 일관된 목표와 원칙을 제시하고 모든 일에 일관된 잣대를 적용했더라면 총선 민심이 지금보단 훨씬 나았을 것이다.

물론 잘한 일도 있다. 대통령이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뽑지 않은 안이한 행정을 질타한 것과 어린이를 성폭행하려던 범인을 방치한 일산 경찰서를 방문해 꾸짖은 건 국민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나는 경제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실감나게 보여 주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이의 생명을 이렇게 소홀히 다루는 나라가 어떻게 안보를 말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고 할 수 있는가란 물음을 던졌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더 많은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 나가야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다. 그동안 국민들로부터 경고음이 울린 건 모조리 '선진의 잣대'에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했을 때였다. 여야 간에든 여당 안에서든 권력이 네편을 깔아뭉개고 내편만 챙길 땐 반드시 그런 경고음이 울렸다.

이 대통령 입장에선 대선 공신(功臣)들이 눈앞에 어른거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더 사리(私利)를 챙기고 누가 더 사적인 권력을 누리려 했는지가 이번에 다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그런 일들이 대통령과 국정에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여실히 확인됐다. 대통령부터 내편 네편 의식을 버려야 진정한 국민통합이 이뤄지고, 나라 전체가 선진의 길로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