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봄밤, 나는 세 살 난 조카 하림이의 따뜻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며 안아달라 보채던 아이가 이젠 먼 길도 자기 발로 잘 걸어 다닌다.
한밤의 고요한 산책이지만 어쩐지 부산하다. 하림이는 요즘 부쩍 말이 늘었다. 나는 그리잘 알아듣는 편은 아니지만 트인 지 세 해밖에 안 되는 작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란 때론 즐거운 음악과 같다고 생각한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목소리가 한껏 높아지더니 점점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하림이가 거의 달리다시피 하며 내 걸음에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싶어 속도를 늦춰도 그뿐, 조금만 걷다 보면 다시 금세 빨라졌다. 그러다 나는 어느새 앞장서서 주위를 구경하고 싶어 연방 두리번거리는 아이를 잡아끌기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걸음이 빨라졌을까.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니면서 좀 천천히 걸으라는 핀잔을 꽤 자주 들어 본 것 같다. 바쁠 것 하나 없는 산책 중에도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몸에 밴 습관이 무섭긴 한가보다. 어린 조카에게 미안해졌다.
걸음을 멈춰 섰다. 하림이가 놀란 듯 돌아보더니 씩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기 시작한다. 내 키의 절반도 안 되는 아이의 인도를 받으며 천천히 걷는 기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제야 뜰의 개나리가 보인다. 아직 찬 바람 부는데 예쁜 고개 성급히 내민 너도 나랑 닮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