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인재(人才)를 뽑거나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崔漢綺·1803~1877)가 쓴 '인정(人政)'이란 책은 왕도가 없어 보이는 인재 선발에 관해 그나마 체계적으로 접근한 역작이라는 점에서 참고가 된다.

최한기는 지인(知人), 즉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 죽은 사람에게는 쓸 수 있지만 산 사람에게는 쓸 수 없다고 실토한다. 죽고 나서야 사람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뜻. 그러나 정작 정치를 하거나 조직을 부리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쓸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최한기는 조심스럽게 산 사람을 알아보는 4단계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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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측인(測人)이다. 기품과 마음가짐, 풍모와 식견, 처지 이 5가지를 고려해 측정해야 한다. 과학기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최한기는 이 5가지에도 가중치를 준다. 기품이 4점, 마음가짐이 3점, 풍모가 2점, 식견이 1점, 처지가 0.5점이다. 이렇게 해서 이론상으로는 10.5점짜리부터 0점짜리까지 가능하다. 지금도 인사문제의 계량화가 어려운데 이미 150여 년 전에 이 같은 계량화 작업이 있었다.

둘째는 교인(敎人)이다. "가르쳐서 쓴다면 버릴 사람이 거의 없다." 측인을 거친 인재의 장단점을 살펴 장점은 진취시키고 단점은 억제하는게 교인의 핵심이다. 셋째는 선인(選人)이다. 직책에 어울리는 사람을 써야지 권세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나 사정(私情)과 안면으로 사람을 골라 써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이어진다. 넷째는 가장 중요한 용인(用人)이다. 용인에 실패하면 아무리 측인 교인 선인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인사가 되고 만다. "측인 교인 선인에 성공하고 용인에 실패한다면 한갓 어진 사람을 불러들였다는 명분을 도둑질한 것일 뿐이다." 반대로 용인에 성공하면 측인 교인 선인이 미진했다 하더라도 성공한 인사라는 평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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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한기의 4단계론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하나 있다. 그가 직접 사람을 뽑아서 써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전부족(實戰不足). 오히려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관직에 있으며 이조판서에까지 올라 인사문제를 직접 다뤄본 이수광(李�光·1563~1628)의 다음과 같은 조언은 어떨까?

"예로부터 벼슬이 3품에 이르면 관상서를 읽지 않아도 스스로 귀인(貴人)을 알아보게 된다고 했다. 세상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지봉유설'에서)

경험만한 스승이 없다는 이야긴데 그것이 통찰(insight)이다. 사람 고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이론과 실체를 겸비했던 인물로 조선 최고는 누가 뭐라 해도 명종과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다.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어 왕실의 적통(嫡統)이 끊어지자 중종의 후궁 안씨의 손자 이균을 임금(훗날의 선조)으로 추대했던 인물이자, 병조판서 시절 휘하에 있던 장수 방진이 이순신을 사윗감으로 고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사람도 이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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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문제와 관련해 이준경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귀감이 됐다. 자신의 아들이 홍문관 관리의 후보로 올라오자 당시 영의정 이준경은 "내 아들이라서 누구보다 그릇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며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최고 엘리트 코스가 홍문관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조정 안팎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이준경이라는 이름은 두고두고 실록에서 자기 아들들을 요직에 앉히려는 조정 중신들을 비판하는 상소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있었기에 건국 이후 처음으로 방계에서 후사를 뽑는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했음에도 무탈할 수 있었다. 측인 교인 선인 용인 통찰 그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 인사권자의 공평무사(公平無私)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사족(蛇足) 한마디. 요즘 인물난(人物難)이라고 한다. 숙종 때 신하들이 인물난을 호소하자 숙종은 일갈했다. "태조(이성계)께서는 망해가던 나라(고려)에서 인재들을 골라내 새로운 나라를 창업했다. 인물이 없는 게 아니라 인물을 보는 그대들의 안목이 없음을 탓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