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미아 6·7동 단독주택가. 2~3m 폭의 좁은 골목길 곳곳에 전기밥솥, 냉장고, 싸구려 장롱이 뒹굴었다. 대문과 담벼락에는 붉은 색 스프레이로 '철거' '출입금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유리창이 깨져 폐가처럼 변한 집이 즐비했다.
이곳은 서울시가 뉴타운 개발을 추진하는 지역. 지난해 11월부터 주민들이 이주를 시작해 전체 1300여가구의 절반이 넘는 800여가구가 빈 집이다.
겉보기에 쓰레기 더미만 뒹구는 이 재개발 지역에 지난달 27일 대낮 도둑이 들었다. "땅, 땅" 울리는 쇳소리를 듣고, 이 지역 경비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텅 빈 한 단독주택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 안에는 박모(41)씨가 망치와 드라이버로 보일러를 뜯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골목 어귀에 작은 화물차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박씨는 "이삿짐센터에서 보일러를 옮기러 왔다"고 둘러댔으나 경찰에 넘겨지자 "빈집을 돌며 고철을 훔치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경찰 조사 결과 박씨는 A이삿짐센터 업주의 지시를 받고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 동안 빈집을 돌면서 상습적으로 고철을 훔쳐 온 것으로 드러났다. 3인1조로 빈집에 침입해 1명은 고철을 뜯고, 2명은 망을 보는 수법이었다.
이 이삿짐업체의 창고에는 이들이 3개월 동안 재개발지역 빈집에서 뜯어낸 동파이프 200㎏, 수도꼭지 100여개, 싱크대 20여개 등 1t 트럭 한 대 분량의 고철이 쌓여 있었다.
◆기업형 고철 절도 사례도 등장
'뉴타운 개발' 등 갖가지 명목으로 진행되는 재개발지역 곳곳에서 '고철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재개발지역의 빈집에서 고철을 뜯어내 팔려는 사람과 고철 소유권을 가진 재개발조합이 벌이는 다툼이다. 현재 서울 전역에서 재개발이 진행 중인 지역은 72곳, 면적은 330만㎡에 총 5만2260가구에 이른다.
미아동 지역에는 지난 1월 25일에도 강모(41)씨가 빈집에서 싱크대와 수도꼭지 13개를 훔치고 나오다 재개발조합 단속반에 적발됐다. 같은 날 동대문구 휘경동 재개발지역에선 박모(45)씨가 혼자서 보일러를 통째로 훔치려고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던 중 순찰을 돌던 경비업체 직원에게 붙잡혔다. 관악구 신림13동 철거 예정지에서도 지난달 21일 빈집 계단의 놋쇠 장식을 뜯어낸 40대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고철 도둑이 극성을 부리자 재개발조합들은 대부분 별도 단속반을 가동하고 있다. 서울 미아 6·7동 지역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현장소장 편모(36)씨는 "올해 초부터 현장에서 매일 6~7건씩 고철 도둑을 적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쓰다 버린 싱크대, 보일러, 대문 등에 대한 소유권은 모두 재개발조합이 갖는다. 조합은 보통 특정 업체에 고철을 수집할 수 있는 권리를 판매해 넘긴다. 그렇게 수집한 고철은 고물상과 중간 납품상을 거쳐 최종적으로 제강·철강업체에 넘겨진다.
고철 도둑은 대부분 몇천원에서 1만~2만원 푼돈을 노린 '생계형 도둑'들이다. 성북경찰서 관계자는 "노인과 노숙자들이 먹고 살려고 훔치는 경우가 많아 '절도' 혐의를 적용하자니 좀 지나친 느낌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A이삿짐센터처럼 직원들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고철을 훔치는 '기업형 고철 절도' 사례도 적지 않다.
◆철강가격 상승, 고철 도둑 늘어
고철 도둑들이 재개발지역 빈집의 수도꼭지와 문고리까지 노리는 것은 세계적인 원자재난으로 고철값이 크게 뛰었기 때문이다. 국내 고철가격은 작년 1월 t당 24만1000원에서 올해 1월 36만원으로 50% 가까이 올랐다.
서울 은평구의 한 고물상 주인은 "단독주택(100㎡·약 30평 기준) 한 채에서 보일러, 수도꼭지, 수도관, 보일러 동파이프, 철제 대문까지 들고 오면 최저 30만원에서 70만원까지 쳐 준다"고 말했다. 1000가구만 돼도 고철가격이 최고 7억원에 이른다는 말이다. 폐가의 고철 중 가장 비싼 것은 보일러다. 20㎏ 정도 되는 작은 보일러는 1만6000원, 80㎏ 정도 되는 큰 보일러는 4만원까지 나간다. 난방용 동파이프는 ㎏당 5000원 정도다. 그 외 수도꼭지는 개당 2000~4000원, 알루미늄 섀시는 ㎏당 2000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경찰은 "재개발이 진행되고 고철가격이 계속 상한가를 치고 있어 빈집에서 벌어지는 고철전쟁이 당분간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