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85) 전 미국 국무장관은 21~22일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 중 이명박 대통령, 유명환 외교부장관 후보자,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을 모두 만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모두들 자신감에 차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키신저 박사는 이번 회의 내내 "역시 키신저"라는 평을 들었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면 세계 각국 전·현직 고위 지도자들이 모두 주변에 모여들어 그의 견해를 듣고 싶어했다. 키신저는 유럽과 아시아, 과거와 현재,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의견을 들려줬다. 하버드대 교수(1954~1971),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1969~1975), 국무장관(1973~1977)을 지내며 쌓은 학식과 체험이 그대로 드러났다. 22일 콘퍼런스가 끝난 후 행사장인 신라호텔에서 키신저 박사를 만났다.
#6자회담이 北核해결 최선의 틀
―새 정부의 외교정책에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역사·지리적 환경 때문에 한국이 어렵고 복잡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미국, 중국,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한국 안보의 기초이자 기본임을 명심해야 한다."
―21일 연설에서 6자회담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6자회담의 결과는 실망스럽지 않은가.
"미국은 6자회담을 하며 북한과 양자대화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너무 나서면 북핵문제가 마치 미·북 갈등인 것처럼 비친다. 북핵문제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해 당사국들의 모든 요구사항과 정치적 고려가 담긴 6자회담이 최선의 틀이라고 본다."
―북핵문제를 더 빨리 해결하기 위해 새로 시도해 볼 다른 대안은 없는가.
"협상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북한이 실마리를 던지고 우리가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북한에겐 북한이 원하는 것이 있고 우리에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 북한과 나머지 6자회담 국가들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를 잘 알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부담과 저쪽에 줄 수 있는 인센티브를 찾아내야 한다."
―한국 입장에서 미국은 혈맹이고, 중국은 국경을 맞대고 부대끼며 살아온 오랜 이웃이다. 미·중관계 변화에 따라 한국 입장이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늘 미국이 중국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미·중관계가 우호적이면,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중국과 친구로 지내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중관계가 악화되면 한국은 어려워진다. 그러나 중국은 외교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는 나라다. 미국도 한·중관계가 나빠지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북아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동북아가 전체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라면 한국은 중요하고도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중관계가 불편해졌을 때 한국이 균형을 잡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고립될 수 있다. 미·중으로부터 동시에 의심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미·중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미국 대선에서 경쟁 중인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어떤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는가.
#美, 오바마의 젋음·말솜씨에 열광
"매케인과는 30년 지기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고, 자신감과 확신을 가진 리더다. 힐러리는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있고, 오바마는 훌륭한 연설가다. 요즘 미국인들은 오바마의 젊음과 초당적인 태도, 뛰어난 말솜씨에 열광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선거결과를 예측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다."
―미국인들이 여성 또는 흑인 대통령을 뽑을 준비가 됐다고 보는가.
"미국인들이 대통령을 뽑을 때 성별 또는 인종을 그렇게 중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민주당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엔 누가 이길지 예측하기 어려운 팽팽한 상황이라고 본다."
―이번에도 안보 문제가 핵심 이슈가 될 것으로 보는가.
"많은 사람들이 안보를 중시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변수다. 경제사정이 더 악화되면 안보보다 경제가 더 중요해진다. 이라크 문제는 현지상황에 달렸다. 치안상태가 나아지면 미국인들의 인내심은 더 커질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훌륭한 리더로 성장하기 위한 비결을 알려준다면.
"비전과 용기다. 지도자가 되려면 비전을 가져야 한다. 남들이 지지하고 도와주지 않아도 그 비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기다."
―그동안 쓴 책이 너무 많다. 한 권만 추천한다면.
"'외교(Diplomacy)'다. 그 안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정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