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최신호에서 베르나르 쿠슈네르(Kouchner·68)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국경 없는 정치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외무장관의 역할이란 게 자국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경 없이 온 세계를 누비는 것이지만, 그를 특별히 이렇게 지칭한 이유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NGO(비정부기구) '국경 없는 의사회'의 창설자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중도 우파 성향의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대통령이 내각 명단을 발표했을 때 가장 파격적인 인사로 꼽혔던 인물이 바로 쿠슈네르 외무장관이다. 프랑스 여론조사에서 종종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꼽혀온, 좌파의 거물 정치인이다. 스스로 중도 좌파 사회당의 대선 후보가 되려고 했었고, 지난 대선 때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Royal)을 지지했다.
이런 그가 어떻게 우파 사르코지 대통령과 단짝을 이뤄 프랑스 외교 정책을 끌어갈까? 그가 우파 내각으로 들어간 것을 놓고 프랑스 좌파 진영에서 발끈하자 쿠슈네르는 르몽드 1면에 '나는 왜 장관직을 수락했는가'라는 제목으로 이런 기고문을 냈다.
"프랑스 외교는 좌도, 우도 아니다. 매일 변화하는 세계에서 프랑스의 국가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1968년 이후 줄곧 연대의식과 진보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왔고, 외무장관으로서 프랑스 외교에 이런 가치를 고양하겠다."
실제로 쿠슈네르는 '행동하는 프랑스 의사'로 국제적 명성이 높다. 인권을 억압하는 독재자들에 대해 국제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개입론'을 주창한 주역이기도 하다.
1939년생인 쿠슈네르는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몸속에는 '저항'의 피가 흐르고 있다. 1908년 프랑스로 이민 온 유대인 할아버지는 나치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청년 시절 파리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붉은 잉크병을 던지며 미 제국주의에 저항한 극좌파였다. 1960년 프랑스 공산당에서 첫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1964년 기자 신분으로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Castro)와 낚시하고 술 마시며 밤을 지새웠다.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많은 다른 유럽 지식인들처럼 극좌파에서 중도 좌파로 옮겨갔다. 1966년 공산당에서 탈당하고, 이후 사회당에 가입했다.
1968년 쿠슈네르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는다. 만 29세의 혈기 넘치는 의사였던 그는 당시 나이지리아 내전 때 비아프라에서 국제적십자사 소속 의사로 구호 활동에 참가했다. 국제적십자사는 저항이 아니라 위험에 빠진 사람을 치료하는 데 주력했다. 국가가 자행한 대량 학살을 목격하고도 침묵해야 했다.
파리로 돌아온 뒤 쿠슈네르는 나이지리아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이어 동료 의사들과 함께 고통받는 지역으로 긴급 구호를 나가는 단체를 만들었다. 1971년 창설된 인도주의 의사단체 '국경 없는 의사회'다.
1979년 쿠슈네르는 베트남 공산 정권을 탈출해 나오려는 수천 명의 보트 피플들을 구하기 위해 배를 전세 냈다. 좌파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경 없는 의사회' 내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쿠슈네르는 이념을 넘어선 인권을 주장했다. 당시 샤르트르, 미셸 푸코 같은 지식인은 물론 우파 지식인의 거두 레이몽 아롱도 뜻을 같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쿠슈네르는 불협화음을 빚은 '국경 없는 의사회' 동료들과 결별하고 나와 '세계의 의사들'이라는 조직을 따로 만들었다.
1988년 쿠슈네르는 유엔을 1년간 설득한 끝에 특정 국가에서 잔학 행위 등이 벌어질 때는 의사나 구호 요원들이 국경을 넘어 '인도주의적 개입'을 인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발칸 사태 및 르완다 사태를 겪으면서 1990년대 들어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인도주의적 개입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5년 유엔 총회가 이를 수용했다.
1992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하에서 인도주의 장관을 할 당시에는 대통령을 설득해 세르비아 군이 봉쇄한 사라예보(당시 보스니아) 공항에 위험을 무릅쓰고 헬기를 타고 들어갔다. 이 일로 일약 '영웅'이 됐다. 이후 보건부 장관, 유럽의회 의원 등을 지냈다.
쿠슈네르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두둔한 몇 안 되는 프랑스 정치인의 하나다. 전쟁 자체는 반대하지만,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정권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높이 외치며 적극적인 인권 외교를 주장하는 쿠슈네르는 이런 점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적극적인 외교 정책과도 코드가 닿는다. 1966년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 나토 통합군에서 프랑스를 탈퇴시킨 이후 '독자 노선'을 주장해온 프랑스 외교정책은 사르코지-쿠슈네르팀을 맞아 '적극적인 개입 정책'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쿠슈네르 외무장관은 취임 후 이라크를 전격 방문했고, 이란의 핵개발에도 강경 발언을 하고 있다. 프랑스와는 역사적 고리가 별로 없는 파키스탄에도, 베나지르 부토 여사가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외무장관이 되어서도 '행동하는 NGO'처럼 밀어붙이는 스타일 때문에, 높은 이상만큼 항상 결과가 따라주는 건 아니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소개된 에피소드다. 지난해 5월 장관에 취임한 직후 다르푸르 사태를 논의하겠다며 토요일에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 인권운동가들도 여럿 초대했다. 이날 쿠슈네르는 수단 내에 망명객들을 지원하기 위해 '인도주의적 통행로'를 만들어주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쿠슈네르 장관은 자신의 제안이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시라크 정부 시절에 만든 정책, 그러니까 유럽 주도의 평화유지군을 차드 쪽에 파견하는 방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신념에 불타는 쿠슈네르의 외교 스타일은 기존 프랑스의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는 미국의 '네오콘(neocons·신보수주의자)'과 비슷한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또 저돌적이고 추진력 넘치는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르코지 대통령 때문에 프랑스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힘없는 외무장관이라는 비아냥거림을 프랑스 좌파 진영에서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