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가면, 제게 인사를 하는 건지 뒤에 오시는 다른 선생님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죠. 그래서 '내게 인사할 때는 안녕하세요 최유림 선생님이라고 해라. 그러면 내 이름도 안 까먹고 얼마나 좋으냐'고 했더니, 이제 그렇게 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최유림(26)씨는 충남 천안 두정중학교의 영어 교사다. 마주 앉아있는 동안, 그는 안경 뒤 깜박이는 두 눈으로 나를 쭉 응시했다. 물론 그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 보일 것이다. 그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가 사관생도처럼 단정한 젊은이로만 보였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을 때나, 흰 지팡이를 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섞여있을 때는 가끔 그런 오해를 받죠. '내가 시각장애인 티가 별로 안 나는구나'라며 기분 좋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길 가다가 행인과 부딪혀 '눈은 어디 달렸어?'라고 막말을 들을 때면, 내가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을 왜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를 만나러 가면서, 눈을 감은 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런 삶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를 쭉 생각했다. 약속 장소에 그가 먼저 나와있었다. 아침 7시30분 서울 은평구 신사동 집에서 시작된 동선(動線)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6호선 새절역에서 지하철을 타서, 불광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고속터미널역까지 와요. 복잡하거나 처음 가면 물어보지만, 보통은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돼요. 터미널에서 표 끊고 승강장으로 나오면 첫 번째에 공주행(行)이 있어요. 첫 번째 위치라 안 물어봐도 돼요. 공주터미널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학교까지 10분 걸려요."

방학 중인 그는 모교인 공주대 임용캠프에서 후배들을 위해 특강을 했다. 그는 마치 학생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말을 걸고 웃기기도 하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현지 원어민들의 정확한 발음을 성대모사 하듯이 따라서 익혔다"는 그의 영어 발음도 유창했다.

애초 시각장애인으로서 맹(盲)학교의 교사가 되는 길은 쉬웠다. 하지만 그는 일반 중등교사 임용고시에 도전했다. 그때까지 장애인이 일반 학생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대학 은사인 강용구 교수는 "장애인은 일반인의 도움을 받는 존재라는 세상의 편견을 깨라. 장애인도 일반인을 도울 수 있다. 한번 해보라"고 '아버지'처럼 말했다.

첫해 시험에서 그는 낙방했고,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성적보다 2차 면접이 더 난관이었을 것이다. '교정시력 0.3 이상' 조항으로는 탈락이었다. 대학 은사들은 제자의 꿈을 위해 해당 교육청과 싸웠다. 신체검사를 담당한 여의사는 '부적격' 대신 '판정 보류'를 내려, 일단 합격시켰다. 1년 뒤 독소 조항은 이 젊은이로 인해 폐기됐다.

작년 3월 2일, 그는 정식 영어 교사로 중학교에 첫 출근했다.

―누구랑 같이 갔습니까?

"혼자 갔습니다."

학기(學期) 동안 그가 천안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는 말을 들었기에, "첫 출근 날 왜 어머니와 같이 안 갔나?"라고 묻자, 그는 "학교에 비치는 제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이 안 보여도, 명색이 애가 아니라 선생님으로 가는 것인데요. 혼자 못 다니는 것도 아니고"라고 응수했다.

"대학교나 직장에 처음 들어가면, 현장에 데려가 오리엔테이션을 해주는 시각장애복지관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교무실이 어디 있고, 어느 쪽으로 얼마를 가면 몇 학년 몇 반 교실이고, 위험 요소가 어디에 있고…. 한 번 받으니 혼자 갈 수 있겠더라고요.

처음 출근하던 그날, 비가 엄청 왔었어요. 천안 두정동이 신개발 지구라 공사도 많이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안 헤매고 잘 찾아갔어요.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다들 '어떻게 왔느냐, 누구랑 같이 왔느냐'고 놀라서 묻기에, '그냥 잘 찾아왔다'고만 했지요. 그래도 혹시 교실 못 찾아서 헤매거나 다른 반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불안한 것 같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는 양손으로 더듬더듬 탁자에 놓인 찻잔을 찾았다.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어떻게 인사를 나눴나요?

"그건 앞이 보이나 안 보이나, 어차피 처음 봤을 때는 누가 누군지 모르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들도 처음 만나면 누군지 물어볼 수밖에 없잖아요. 저도 물어봤죠. 아니면 상대방이 자기가 누구라고 알려주었어요."

나이로도 한참 위이고 세상을 살아도 훨씬 더 살았는데도, 답답하고 어리석은 것은 내 쪽이었다.

―수업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나는 늘 '차이'(差異)를 의식했다.

"일반 선생님들과 차이가 없어요. 다만 교과서를 일반 문자로 볼 수가 없으니, 점자 단말기를 쓰고, 점자 프린터로 출력해 읽어요. 음성출력장치를 통해 인터넷 자료들을 검색합니다. 일반인이든 시각장애인이든 노력하고 열심히 해야 성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잖아요."

이번 주말 그의 스토리를 담은 '최유림이 사는 세상'이라는 책이 출간됐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지낸 룸메이트의 이런 후기(後記)가 달려있다.

〈시험 기간 때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유림이가 점자 단말기를 이용해서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을 자주 보곤 했다. 그때 생각했다. '유림이는 좋겠다.' 우리는 빛이 없으면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읽으려는 시도를 할 수도 없지만,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다니 말이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안 보이니까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보이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익히지만, 저는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으로 파악합니다. 한 번만 들어도 그 사람이 누구라고 느껴지는 목소리가 있고, 또 안 그런 목소리가 있지요. 사람을 만나면 작은 말 한마디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죠. 그래서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은 있어요."

그는 담임을 맡지 않고, 1~2학년의 21개 학급을 옮겨 다니며 한 시간씩, 주당 21시간 수업을 한다. 한 반 학생 수가 40명. 그는"한 달 지나니 학생들(약 840명) 이름을 거의 다 외우게 됐어요. 아이들은 자기 이름 불러주면 좋아하잖아요"라고 말했다.

―수업 중에 주의가 산만하거나 떠드는 학생들을 어떻게 합니까?

"그런 학생들은 제 수업 시간에만 떠드는 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 시간에도 많이 떠들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안 해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고, 칭찬을 많이 해줍니다. '너 참 뛰어나다. 전에는 잘 못하더니 인제 보니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고. 칭찬을 자꾸 해주면 '선생님이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관심 있고 희망을 주는구나' 하고 느끼는 거죠. 조금씩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이 교사로 왔을 때 어쩌면 학부모들이 반대했을 것 같은데.

발령 받았을 때 그런 걱정을 가장 많이 했었죠. 두정동 쪽이 천안에서도 신개발 지구라서 부모님들의 교육열이 높으신 편이거든요. 어쩌면 부딪힐지 모르는데, 과연 잘 풀릴까, 한두 달, 1년, 2년이 아니라 평생 해야 할 직업인데. 평생 그런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학부모님들을 모시고 공개 수업도 했지요. 잘 모르겠지만, 아직은 부정적인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최유림(왼쪽)씨가 모교인 공주대학교 교정에서 자신의 스승인 사범대학 영어과 강용구(오른쪽)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왜 굳이 선생님이 되려고 했죠?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같이 나누고,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또 얻을 수도 있어요. 저만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서 저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떻게 생겼을 것 같아요?

잠깐 당황한 그는 좋은 말만 했다.

―스스로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나요?

"대충 짐작할 수 있죠. 피부색이 좀 빨갛고, 여드름도 좀 많이 나있고, 수염도 났고…."

―그늘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누구나 고민과 두려움, 콤플렉스가 있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고 살잖아요. 저도 똑같은 거죠. 앞이 안 보이니까 당연히 불편함이 있겠지요. 이는 다 아는 것인데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나요. 다만 장애인이라면 어둠 속에서 살고, 상심(傷心)이 크고 우울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맹(盲)학교나 특수학교에 가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밝게 살아요. 우리도 밝게 산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내 운명은 이런가, 왜 남들과 같지 않을까 하며 비관에 빠진 적이 없었나요?

"거기에 빠져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차피 죽을 수 없다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쪽이 낫죠. 장애로 인해 불편함이 많지만, 또한 장점도 있어요. 장애인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요. 우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이들은 대개 개방적이고 베풀 줄 알고 여유가 있지요. 이런 분들과의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배우게 돼요. 아이들이 어른의 행동을 보고 배우듯이. 물론 힘든 일이 닥칠 때면 우울해지겠지요. 하지만 그 속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요. 그러면 제 주변 분들이 저를 부담스럽고 어렵게 여기게 돼요."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느냐를 많이 의식하는 편입니까?

"아무래도 그렇지요. 제가 행동을 잘못하거나 안 좋은 모습을 보였을 때, 이것이 최유림이라는 한 사람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아직은 '최유림 저 사람 좀 문제 있다'가 아니라, '시각장애인은 저런가보다'라는 식으로 확대해석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앞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조롱을 받거나 놀림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나요?

"어렸을 때 아이들은 갑자기 눈이 안 보여서 더듬더듬 거리는 친구를 만나면 호기심이 생기고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어른들은 대놓고 놀리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이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이 있고, 저 사람은 그렇지 않구나 하고 나름대로 느낍니다. 어차피 삶이 그렇잖아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놀리는 애들과 싸운 적이 많았나요?

"몇 번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때로는 그게 필요하지만, 너무 싸우기만 하면 너한테 나쁘게 대하는 애들이 오히려 재미있어 할 거다. 또 너를 도와주려는 착한 아이들은 너의 화내는 모습을 보면 멀어질 거다. 그러니 놀려도 무관심하게 대하고, 착한 애들이랑 잘 놀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이게 제 방패막이가 됐어요."

그는 외아들이다. 부모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다. "유림이가 자식에 대한 모든 바람을 채워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슈퍼마켓을 운영하다가 요즘은 소규모 배달업을 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쪽이었습니까?

"초등학교 때는 희미하게나마 물체가 보여 지팡이를 안 짚고 다녔어요(선천성 시신경위축망막증). 자전거도 타고 또래들과 어울렸지요. 그러나 6학년이 되면서 완전히 안 보였어요. 그래서 맹학교의 도서관에 가서 점자책이나 녹음테이프, MP3파일로 전래동화나 위인전을 많이 읽었죠.

어머니는 항상 위인들의 예를 많이 들었어요. 안 보여 넘어지면 상처 나고 아프잖아요. 그래서 울고 있으면, 귀가 아프게 들었던 이야기가 '왜 우느냐,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도 우리 군사를 위해 방패로 가리고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총알에 맞았으니 얼마나 아프겠냐. 그런데 너는 조금 까진 것 갖고 그렇게 우느냐'였어요."

―희미하게 보이다가 완전히 안 보이게 됐을 때, 어떤 심정이었지요?

"어릴 때는 사람이 서있으면 피해서 걸어다닐 수 있었지요. 지금은 빛이 있고 없고 명암(明暗)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거든요. 만약 일반인들처럼 시각에만 의존해 생활했다면 이건 상실감이 큰 거죠. 그런데 저는 약간 보이기는 했어도 시각에 의존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예전에 보이던 게 안 보이니까 아픔이 있었겠지만 크게 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거죠."

―무슨 색을 좋아합니까?

그는 슈트에 노란색 넥타이를 맸다.

"노란색이 아무래도 밝은 편이어서, 어렸을 때 이상하게 노란색만 보이더라고요."

―살면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던 적은 언제였습니까?

"어렸을 때는 사실 그런 게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들을 처음 만나면 '어떻게 생겼을까'하고 궁금해져요. 제 나름대로 상대의 목소리나 말투 등으로 '스타일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다'고 짐작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뀐 계절의 풍경이나 세상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요?

"여행을 가면 그런 것이 보고 싶을 때가 있죠. 산에 가는 것은 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서잖아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좋으니까. 주위에서 설명을 잘해주면 즐겁지만 내 눈으로도 직접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죠."

―상처가 되는 질문일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안 보이는데 여행을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2004년에 대학 친구들과 태국 여행을 갔어요. 여행을 가면 관광 가이드가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는 어떤 특징이 있고 생활 모습은 어떻다고 설명을 해주거든요. 일반 사람은 그런 설명을 잘 안 들어요. 저는 열심히 들은 설명 내용과, 함께 간 사람들이 '이것 봤는데 좋았다'하는 이야기들을 연결시켜 나름대로 그려보는 것이죠."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나요?

"관심은 있는데 다 그렇잖아요. 자신이 적극적으로 해서 잘될 수 있고 적극적으로 했는데도 잘 안 될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안 했는데 상대방이 적극적이어서 잘될 수도 있고, 또 나도 적극적이지 않고 상대방도 적극적이지 않으면 잘 안 될 수 있고, 그런 맥락인 것 같아요."

―원래 이처럼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어투로 말합니까?

"학생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아요. 작년부터 교직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달라졌다는 생각은 들어요. 사회는 사회이니까요."

작별 인사를 나눌 때, 그는 요즘 골프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상상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생각에 갇혀있는 것은 내 쪽이었다.

최유림 교사는 

출생 때부터'선천성 시신경위축망막증'에 걸렸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서울 맹(盲)학교를 다녔다. 2002년 공주대 특수교육과에 입학, 영어 과목을 복수전공 했다.

3학년 때 영어 교재를 분석해 영어로 발표하는 수업 시간이 전환점이 됐다. 이 수업을 담당한 강용구 교수는“그 전에 다섯 명의 시각장애인 학생이 내 수업을 들었다. 이들은 발표 날짜가 오기 전에 내 방으로 찾아와‘저는 발표할 수 없으니 리포트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유림이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15분간 발표를 했다. 지켜보면서 나는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강 교수는 영어 과목 임용고시에 도전할 것을 권했고, 같은 과 휴버트 교수(한국계 호주인)가 헌신적인 지도를 했다. 2007년 1월 그는 국내에서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 일반 과목 임용고시(영어과)에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