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임을 정말로 싫어한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복잡한 게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테트리스처럼 간단한 게임조차 늘‘하수’를 벗어나지 못한다. 고스톱에 카드는 고사하고 민화투도 못 치니 할말 다한 거다. 묵찌빠도 싫고, 디비디비딥도 싫고, 소발바닥, 닭발바닥 같은 놀이도 싫다.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지독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데 뭐 하러 저런 걸 한단 말인가! 그건 아마도 연애의 속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홍상수의 영화가 싫다고 말한 내 친구의 심정과 비슷한 것 일지도 모른다. 나는 연애를‘게임’으로 비유하거나 ‘역학관계’로 묘사하는 친구들에겐 묘한 반감까지 느끼곤 했다. 모름지기 게임을 잘 하려면 룰을 잘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쪽으로는 전혀! 라고 해도 좋을 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세상엔 길치, 기계치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타고난 게임치였다. 연애가‘게임’이라는 정의를 전제한다면 인과론적으로 나의 찬란해야 할 20대의 절반은 짝사랑, 못된 남자와의 연애, 전화 기다리기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대부분을 내가 솔선해서 한 셈이다. 물론 수다스럽고 정 많은 내 친구들은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자복은 없어도 넌 인복이 많잖아!”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이런 말, 참 위로되지 않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당근을 못 먹는 여자는 아무리 으깨놓아 본래의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당근이라도 음식에 들어간 당근을 느끼는‘찰나적 순간’이 있다. 나는 게임이나 경쟁에 그런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제대로 주눅 든 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좋아하는 선배를 만났다.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데다가, 글까지 잘 써서 나 같은 사람은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 잘난 선배다. 근데 그 선배가 갑자기 농담을 꺼내면서 별점을 매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엔 나, 그리고 세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근데 갑자기 이 남자들이 각자의 농담을 평가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친분이 두터운 이세 사람이 만든 모임의 이름을 알고야 말았다. 이름 하여 ‘무별 클럽’. 그들은 농담도 게임처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재밌는 건 잡지사에 다니는 선배와의 대화 내용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때 마침 우리는 개편을 단행한 잡지의 칼럼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 칼럼 내용이 어렵다는 데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근데 한 선배가 이런 말을 꺼내는게 아닌가.“ 그 필자 말이야. 꼭 칼럼계의 박상륭 선생(소설가) 같지 않아?”

그 농담은 옆 자리에 있던 후배들로부터 별 네 개가 주어졌다. 그리고 후배 중 한 명에겐 또 다른 농담이 따라 붙었다.“ 시 쓰면서 어려운 한자 좀 쓰지 마. 넌 쌍문동의 정성일이냐?”다들 박장대소했다. 후배는 쌍문동에 살았고, 그의 아름답지만 어려운 산문시는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 하는 정성일의 길고 긴 영화평과 흡사했던 것이다. 그제서 나는 술자리에선 농담에도 미묘하게 점수가 매겨진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남자들의 유쾌한 게임이라는 것도.

이처럼 게임 싫어하는 여자의 인생은 나날이 피곤해진다. 느긋한 술자리에서조차 자신의 유머감각을 검증받아야 하는 저 전투적인 삶의 자세라니. 하지만 내가 아는 거의 모든 남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아무리 웃긴 농담을 해도 절대 웃지 말아봐. 여자 앞에서 자기 유머감각이 형편없다는 걸 느끼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을걸! 넌 너무 재미없어, 란 얘긴 남자들에겐 최고의 수치스런 말이야.”

어느 잡지에서‘여자는 왜 남자보다 덜 웃길까’란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기사에 의하면 여자는 유전학적으로 사람들을 웃겨야 할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이란다. 성격상‘화장실 유머’가 많은 남자들의 농담에선 신체가 농담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여자들의 몸’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롱거리로 만들지 않는단다. 또 유머란 지능을 드러내는 일이고, 대개의 유머가 상대를 제압하는 공격성을 가지기 때문에 사냥꾼 기질이 풍부한 남성에게 더 적합하다는 거다.

아! 그랬다. 결국 나는 조용한 카페에서 경쟁으로 각성된 뇌를 수다로 승화시키는 여자들과의 대화에 훨씬 더 적당한 인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