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40년 동안을 엎드려 지내온 만화가 지현곤씨(7월 28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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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산의 경남대학

정문 옆 골목으로 들어가 후미진 주택 2층 단칸방에서 그는 여전히 살고 있다. 2m×3m 크기의 방,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닿는 방이다.

척추결핵으로 뼈와 살이 말라붙은 그의 하체는 담요 속으로 숨었다. 머리맡에는 펜과 연필 들이 담긴 통, 잉크, 화판, 작업 중

통증을 완화해줄 물파스가 그대로 놓여있다.

“글쎄요, 뭐, 순식간에 ‘천지개벽’할 수가 없겠지요. 전에 봤던 그대로 틈틈이 만화를

그리고, 크게 바뀐 게 없어요. 사람들의 관심에 비해 내가 부응하지 못해 아쉽네요.”

방 안에서 엎드린 그의 낙(樂)은 열린 방문을

통해 달을 보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그쪽 방향으로 달이 뜬다. 인터뷰 당시 그의 카메라 액정 속에는 달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망원렌즈가 없어, 쌍안경을 구해가지고 카메라 렌즈에 연결해 찍었어요. 수십, 수백억원을 들여 하늘에 떠있는 달에 며칠간 머무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도 만약 그런 금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꼭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하필 달이 왜 보고 싶은가?

“해는 눈이 부셔 볼 수 없지 않는가. 도시에서는 반짝이는 별도 보기 힘들고. 그러니

달뿐이다.”

―달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

“만월(滿月)이었다가 줄어들고 없어지고, 그런 달의 변화를 보면 내

생활에 변화가 없어서인지 좋더라. 일반 사람들은 달을 보고서 ‘아, 좋다’고 하는 이가 드물지만,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대 일상에

평범한 게 다른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것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지난겨울에는 만화 그리는

일보다 그냥 방문을 열어 놓고 밤새 달만 쳐다봤다. 마냥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와의 약속으로 나는 천체망원경을 사서

보내줬다. 그가 달을 더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망원경은 ‘장식품’이 됐다. 거동이 불편한 그에게 천체망원경은 너무 크고 지지대는 너무

높았다. 이런 사실에 그는 미안해했고, “천체망원경이 있으니 방 안이 그럴듯하게 보여 좋다”고 말했다.

그의 계좌로는 알음알음

600여만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 성금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좀 샀나?

"성금으로는 신장 계통의 약만 사먹는다. 내 돈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다."

그는 만성 신장(腎臟) 질환도 앓고 있다. 단백질이 몸에 저장되지 못한 채 빠져나오는 증상이다. 40년 동안 방
안에서 지내며 이를 그냥 안고 살아왔다.

그는 외출을 두려워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서 그의 카툰(만평)
작품이 전시됐을 때, 평자(評者)들은 "정규 학력으로는 초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끝인, 말 그대로 못 배우고 방 안에서만 지낸 사람이 이 경지에
오른 것은 불가사의"라고 했다. 주최 측은 전시회에 그의 참석을 원했다. 세인들의 주목을 더 받게 함으로써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는 거절했다. 그 뒤 앙코르 전시회가 열렸고 훨씬 더 강한 참석 요구가 있었지만, 역시 그는 몸을 사렸다.

"방 안에서
늘 혼자 살아왔으니, 외부에 대한 공황(恐慌)장애일 수도 있고, 공포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못 간 이유는 대소변 문제 때문이다. 수십
년간 나 혼자 힘으로 그걸 해결해왔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고 싶거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참 별나다. 까다로운
성격이네'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바꿀 수가 없다. 이는 내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방 안에 화장실에
딸려있어 씻는 것도 내가 씻는다. 머리도 내 손으로 깎는다. 내 머리가 짧은 것은 취향이 아니라, 신장(腎臟)이 안 좋아 몸속에서 열이 생기면
머리가 조금만 자라도 머릿속이 화끈거려 참지 못해 밀어버리는 거다. 앞부분은 그런대로 깎지만, 뒷부분은 깎고 나면
오톨도톨하다."

이렇게 말했던 그가 인터뷰 후 40년 만의 외출을 했다. 한 번은 방송사가 와서 '화면'을 위해, 그를 안아서 집
바로 옆에 있는 경남대학에 옮겨졌다. 다른 두 번은 신장 계통의 질병 치료를 위한 병원행(行)이었다.

"복지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가게 됐다. 장정들이 저를 달싹 안고 계단까지 내려가 휠체어에 태우고, 리프트가 장착된 차량에 실었다."

―40년
만의 외출은 어떠했나?

"경황이 없었다. 차에 실려서 거리 풍경을 봤는데…. 뭐, 사람 사는 게 다 같지. 내 마음대로 찬찬히
둘러봤으면 모르지만. 동행한 분들이 모두 바쁜데, 어디 가보자는 말이 차마 안 나왔다. 병원에 볼일 보고 다시 오는 데 2시간쯤 걸렸다."

40년 만의 외출은 우리의 기대보다 그에게 큰 의미로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그의 삶을 바꿔놓고 있는 것은 '노트북 컴퓨터'다.
방송사를 통해 장애인복지단체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그는 평생 처음 컴퓨터를 만졌다고 한다.

"조작하는 법도 모르고, 다들 바빠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뒤집어엎기도 하고, 불통되기도 했다. 몸이 이래서 한 손가락으로만 친다. 얼마 전에 이메일을 보내는 방법을
알았고, 딱 두 번 보내봤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acdozzz@naver.com이다. 가장 손쉬운 자판을 눌려서 만들어진
주소다. 요즘에는 종일 인터넷을 끼고 산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뭘 하나?

"다른 홈페이지에 들어가고 검색도 하며,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한다. 어제도 인터넷으로 다른 분들의 만화를 보느라 새벽 4시까지 했다. 인터넷에 빠지다 보니 만화는 한 달에 한 점도
제대로 못 그린다. 전에는 두 점쯤 그렸는데. 나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화를 열심히 그려야지, 그런 재주밖에
없는데.

그래도 인터넷이 너무 재미있다. 옛날에 망원경이나 카메라에 굉장히 관심이 있어, 광고지를 보고 해당 업체에 카탈로그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사이트에 다 나오더라. 달을 보는 것도 그렇다. 카메라에 찍어 확대해 봤는데, 인터넷에
들어가니 망원렌즈로 찍은 달 사진이 많다. 내가 찍어 보는 것보다 이걸 보면 되겠더라."

―만화 작품은 좀
팔렸나?

"아직 한 점도 안 팔렸다. 가진 사람은 없으면 불편하지만, 없는 사람은 없어도 금방 크게 불편할 것은 없다. 신문에 난
뒤로 마산시청 분들이 '정말로 그런 사람 사나' 싶어 들르셨다. 그러더니 내년 초에 작품이 판매되도록 전시회를 열어주겠다는데…."

―외부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나?

"나를 찾는 전화는 하루 종일 한 통도 안 걸려온다. (웃으며) 인기가
시들해져. 내 동생이 만들어준 홈페이지에는 하루 두세 명쯤 들어온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한 살을 더 먹어가는
게 두렵다. 나는 원숙이나 성숙함과는 거리가 먼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움을 받았으니 사회 본보기가 돼야 할
텐데…."

‘Why?’ 첫 호의 커버스토리였던 신성일씨는 나이로는 원숙해야 할 칠순 노인이나, 여전히 베토벤 스타일의 파마를 하고

있다. 이제 파마머리가 그의 브랜드가 됐다. 출감 직후 가졌던 그와의 인터뷰는 장안을 시끄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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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여인을 보면
즐겁다. 요즘 젊은 여인들은 종아리가 다 예쁘다. 우리 동년배들이 무슨 자랑처럼 '20년 동안 여자 근방에도 안 가봤다'고 말하면, 나는
'여보시오, 그러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소. 여인에게 다가가 보려는 그런 마음이라도 있어야지'라고 한마디 해준다.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무슨 죄가 되나. 교도소에서 여인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감방 안에 이신바예바(장대높이뛰기 선수), 샤라포바,
힝기스(이상 테니스 선수), 미셸 위(골프 선수) 등 신문 스포츠면에서 오려낸 사진을 붙여두고 그 안타까움을 달랬다. 나는 늘 여인을 사랑하고
생각해왔고, 그것은 내게 에너지를 줬다."

이런 '바람둥이' 같은 고백은 숱한 주부 독자들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의 부인
엄앵란씨가 마음고생한 것을 떠올리면,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 그는 전혀 끄떡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고 추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자유스럽게 사는 것. 이런 청바지와 캐주얼 복장이 얼마나 좋은가"라면서.

그의 휴대전화 연결음도 '마이 웨이(My Way)'다. 그는 "경북 영천에 한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계곡 근처의
포도밭 옆인데, 적당한 언덕에 햇볕이 좋고 여기서 살 작정"이라고 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다. 인터뷰가 보도된 날 아침 일찍, 그가 전화를 걸어 “옆에 있는 우리 엄여사가 통화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남편 신성일의 입장만 썼다고 항의하려니 여겼다. 전화에서 엄앵란씨의 목소리가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고, 세상 사람들은 정말 이 신성일의 진가를 너무 몰라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엄앵란씨에 대해 신성일은 출감 후 다음과 같은 ‘공약’(公約)을 한 바 있다.

“우리 엄여사에게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지방 곳곳을 죽을 때까지 함께 다니자고 했다. 사실 그전에는 내 마음의 중심에서 엄여사가 조금 벗어나 있었다. 내 다른 야망들로 인해. 그러나 이제 엄앵란이는 확실히 내 중심을 차지했다.”

―정말 부부가 지방 곳곳을 사이좋게 다니고 있나?

“손잡고 지방을 둘러보는 것은 못 했어. 그쪽도 워낙 바쁘고.”

―엄여사와 다퉜다는 소문도 들리더라.

“내가 한옥을 짓느라고 돈 좀 달랬는데, 안 줘서 좀 그랬지. 엄여사는 팔당 쪽으로 집을 지었으면 했으나, 내가 영천 쪽으로 고집을 부렸어. 그런 일이 있고서 돈줄을 쥔 엄여사가 건축 경비를 선뜻 안 내놓아 좀 티격태격했지. 잠깐 그랬던 거지.”

―출감한 지 10개월이 됐는데, 이제 완전히 바깥 삶에 적응이 됐나?

“적응이라고 할 게 있나. 그 안에서도 괜찮았는데. 하여튼 나오니 너무 고맙고 즐겁다. 지금은 펄펄 뛰어다니고 있지.”

―여전히 젊은 여인들을 바라보는 데서 삶의 즐거움을 얻나?

“난 이쁜 엉덩이만 보면 뛰어가서 뽀뽀해주고 싶다. 그런 여자의 아름다움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골프 연습장에서도 이쁜 여인이 곁에 있으면 집중이 안 돼 일부러 여인이 눈에 안 띄는 한쪽 구석에서 친다.”

―엄여사와는?

“우리는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사는 거지. 그런데 왜 이런 걸 묻나? 애인 한 명 소개시켜 줄려나?” 영화에는 다시 출연하지 않겠다고 한 그는 ‘신상옥 최은희 기념사업회’ 이사장 직을 최근에 맡았다.

신성일씨만큼이나 '마이 웨이'로 살아왔던 최명재(崔明在) 전 파스퇴르유업 회장(9월 1일 보도)은 여전히 집 안에서만 지내는 중이다. '사우나' 의자에 앉아 종일 TV로 외국 영화를 보면서, 귀가 안 좋은 그는 자막(字幕)으로 그 내용을 읽는다.

7년 만에 언론 앞에 드러내, "파스퇴르 우유는 망해서 팔았고, 내게 남은 것은 민족사관고등학교밖에 없소"라고 웅얼거리던 그의 모습은 독자들을 감회에 젖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부인은 "인터뷰가 나온 뒤 폐인이 된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걸 보니 반갑다며 눈물 흘리는 이들도 있었고, 예상치도 않는 여러 분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지선씨도 인터뷰했더군요? 회장님과는 한강성심병원 동기(同期)예요. 회장님이 화상(火傷)으로 입원하고서 일주일 뒤에 지선씨가 들어왔어요"라며 '인연'을 말했다.

이지선씨(12월 8일 보도)는 미국 보스턴에서 전화를 받았다. 현지 시각 크리스마스 밤 9시. 교회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녀는 "방학 기간에 잠시 귀국해 재건성형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대학교 4년 때(2000년 7월) 불의의 차 사고로 화상을 입었던 그녀는 “병실에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싸움을 시작한 나는 더 이상 이지선이 아니라 ‘BURN(화상)’으로 불렸다. 여덟 개 손가락을 잘라내면서 나만의 고유성을 보여줄 지문도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동안 2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픈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금도 가끔 ‘나 같으면 못 살았을 거다. 자살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살아서 참 대단하다’라는 식의 이메일을 받는다. 마치 내가 굉장히 독해 살아있다는 것처럼. 물론 내 삶에 대한 용기를 칭찬해주려고 하는 말이지만, 굉장히 슬프더라. 또 내 이름 앞에 따라붙는 ‘화상 환자’라는 수식어도 그렇다. 내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박사가 돼도, 그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니겠지.”

그녀는 내년 5월 보스턴대학에서 석사(재활상담)를 졸업하고, 현재는 박사 과정을 수속 중에 있다. 그녀는 “보도된 뒤로 내 일상에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기사를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全曲) 연주를 일주일간 강행해, 피로에 절어있던 백건우·윤정희 부부(12월 15일 보도)는 “그 아가씨를 생각하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푸념할 수가 없어”라고 했다. 연주 후 물냉면과 갈비탕을 동시에 해치운 백건우는 “정말 중노동이다. 무거운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종일 두드렸으니”라고 했다. 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손목에 붙어있는 파스가 인상적이었다.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전부를 걸고 있는 조태권 광주요 회장(10월 27일 보도)은 통 큰 상체나 열정(熱情)에서 백건우와 닮았다. 그때 인터뷰 제목이 ‘그는 미쳤다!’였고, 그는 이를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올 때도 “하하하, 저 ‘미친놈’입니다”라고 했다.

두 달 뒤 서울 신사동에 있는 그의 음식점 ‘가온’에 초대받았다.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Napa Valley)에서 포도밭 주인과 와인제조업자 60여명을 초대한 만찬 이벤트(저녁 한 끼 행사를 위해 1억6000만원을 들였음)를 선보인 것이다.

우리가 이 13만원짜리 멋진 저녁을 먹는 데 전념하는 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열심히 식(食)문화에 대해 강의했다.

“비싸다? 모든 문화는 ‘사치(奢侈)’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과연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이 있는가. 전 세계 중산층은 20억명쯤 늘어난다. 이들에게 고급 한식을 팔아먹을 전략을 세워야 한다.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은 1320조원, IT 산업 시장은 2700조원이지만, 식품 산업 시장은 4800조원이며, 이 중 외식 산업이 2300조원이다.”

마지막까지 그는 “신임 대통령은 첫 축하연을 열 때 고급 한식을 내놓아야 한다. 해외 언론에 우리 음식을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는 기회다. 이는 영부인이 해줘야 할 몫”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반면 퇴임할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대부'라는 송기인 신부(4월 14일 보도)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직에서 지난달 말 물러났다. 그는 경남 삼랑진 성당에 내려가 살고 있다.

“살아오면서 소주 마시는 게 제일 큰 자산”이라고 말하는 그와 그 뒤로 몇 번 술잔을 나눴다. 그는 한결같은 노 대통령의 지지자였고, 정권의 파행은 보수언론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실패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내심 알고 있었다. 기자실 폐쇄조치에 대해 “왜 저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노 대통령을 안타까워했다.

설악산 백담사 회주인 오현(五鉉) 스님(6월 16 일 보도)도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런 이유를 밝히면서. "처음 절에 오니 밥도 먹을 수 있었고, 또 중질이 돈벌이인 줄 알고 열심히 살았지. 불전함(函)을 두면 신도들이 시주를 바치잖아. 나는 돈벌이를 위해 열심히 염불도 했지. 장례식에서 염불하면 돈 벌잖아. 그래서 밤새도록 할 때도 있었고, 연주대(관악산 정상의 암자)까지 염불하러 올라가기도 했지. 나중에 지나고 나니, 중이 돈벌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세상을 살다보면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데…. 그러니 할 일이 없어졌어. 그래서 술 마시지."

처음 만났을 때, 이 무애자재(無涯自在)한 노승은 틈만 나면 “기사를 쓰려고 한 것이 아니지?” “녹음하지는 않겠지?”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전부 나 욕한다. 정치꾼이라고”라고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나는 침묵으로 응대했다.

보도가 된 날 아침, 전화가 걸려왔지만 일부러 안 받았다. 나흘 뒤에야 연결되자, 그는 “내가 뭐랄까봐 전화 안 받았나. 얼마나 광고됐으면, 전국에서 내게 술을 보내온다. 좋은 술 한 병 줄 테니 한번 들르소”라고 했다. 낮 업무 시간에도 전화가 왔다. “혼자서 마시고 있는 중이니 지금 빨리 오라. 이놈의 삶에서 내가 벗어날 때가 됐는데 언제 보려고 안 오나”라며.

그는 수행자의 최고 공부를 ‘죽는 공부’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생물이란 때 되면 죽고 어차피 죽음을 맞게 되는데, 평생 죽는 공부를 붙잡고 삶을 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나?

“여러분들은 욕망이 꽉 차있으니까, 안 보이는 거야. 욕망 때문에. 돈 벌고 일하고 집을 짓고 여자를 만나고 그런 걸 추구하니, 내가 아무리 늙어 죽는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들어. 하기야 그런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전부 다 중질을 하면 안 된다. 세상에는 잘난 놈만 있어도 안 되고. 못난 놈도 있어야 한다. 중도 목사도, 온갖 게 다 있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어울려야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다.”

올 한 해가 이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