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과 키신저의 관계는 복잡했다. 서로 증오하면서 동시에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닉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키신저는 미국 최고의 국가안보보좌관이자 외교전문가가 되고 싶어했다. 공통 관심사는 국제정치. 두 사람은 각자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서로를 이용했다. 닉슨은 키신저의 지식과 전문성, 키신저는 닉슨의 권력을 활용했다. 닉슨은 늘 주인공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키신저가 잘릴까 걱정돼 아부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꼈고, 키신저는 자신 없이는 닉슨의 원대한 국제정치 구상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즐거워했다.
몇달전 국내에도 소개된 ‘케네디 평전’를 비롯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린든 존슨, 로널드 레이건 등 미국 대통령 전기를 잇따라 내놓은 로버트 댈렉(Robert Dallek·73) 미국 보스턴대 교수가 20세기 국제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닉슨과 키신저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썼다. 닉슨은 듣기 싫었겠지만 닉슨과 키신저는 외교에 관한 한 ‘공동 대통령’이었다. 동업자였던 셈이다. 좀 더 심하게는 “키신저가 죽으면 닉슨이 진정한 대통령이 될 것”이란 농담이 워싱턴에서 나돌던 시절도 있었다.
댈렉은 약 2만 쪽에 달하는 키신저의 통화기록, 새로 공개된 수백 개의 닉슨 대화녹음 테이프, 닉슨의 비서실장 핼더맨의 일기를 뒤져 두 사람의 관계를 재구성했다. 키신저를 비롯 당시 주요 외교정책 관련 인사들도 인터뷰했다. 저자는 그러나 녹음과 서류 등의 형태로 남아 있는 공식자료에 기초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하버드대 교수로 외교정책에도 깊이 간여했던 키신저는 닉슨과 험프리가 대결한 1968년 대선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민주당의 험프리 후보를 지지하며 “닉슨이 당선되면 재앙”이라고 했지만, 닉슨과도 만났다. 누가 되든 자신을 기용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승리한 후 키신저를 찾았다. 국제문제에 대한 자신감과 관심으로 꽉 찬 닉슨은 외교를 국무부에 맡겨두지 않고 백악관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키신저를 국가안보보좌관에 지명한 것은 이런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서로 초면이나 다름 없어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키신저는 첫 만남에서 닉슨이 자신에게 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키신저의 첫 임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세계를 주물렀다. 베트남전 종전, 소련과의 긴장 완화 시작, 미·중관계 개선 등은 20세기 역사의 한 장을 넘기는 대 사건이었다.
세계사를 바꾸겠다는 야심에 불탔던 두 사람은 죽기살기로 일했다. 닉슨은 사교용 점심 약속은 하지 않았다. 5분만에 밥을 먹고 나머지 시간엔 일을 했다. 키신저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의 과도한 지시를 수행하다가 과로로 기절한 부하직원에게 “그런데 서류는?”이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백악관 참모들은 그토록 원대한 전략을 추진하는 뛰어난 지도자들과 일한다는 사실에 도취돼 비인간적인 근무환경을 견뎠다.
그러다가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졌다. 민주당 선거본부 도청을 지시하고도 이를 은폐하려다 탄핵위기를 맞아 스스로 사임하기까지, 닉슨은 국민의 관심을 국제문제로 돌려 위기를 모면해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키신저는 닉슨에게 더욱 중요한 참모가 됐다. 닉슨은 국민과 의회, 언론에 거짓말을 했고 키신저는 묵인했다. 닉슨의 백악관이 곪아터지는 데는 키신저도 크게 기여한 셈이었다.
퇴임 후에도 두 사람의 경쟁은 계속됐다. 닉슨은 숱하게 외국을 여행하고 아홉 권의 책을 써 명예회복을 해보려고 기를 썼다. 닉슨의 지식과 체험은 귀했으나, 후임 대통령들이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 찍힌 닉슨에게 공개적으로 조언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닉슨은 자신을 백악관 뒷문으로 드나들게 하는 홀대에 펄펄 뛰었다. 반면 키신저는 닉슨 사임 후에도 포드 행정부에 남아 외교정책을 쥐고 흔들었다. 지금까지도 외교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북핵문제, 테러 문제 등 키신저의 조언이 등장하지 않는 외교분야가 없을 정도다. 4000쪽에 달하는 세 권짜리 회고록 등 책도 9권이나 썼다.
닉슨이 현직 때는 아첨을 아끼지 않던 키신저가 훗날 한 행사에서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닉슨은 불쾌하고 신경질적이며 괴상한 사람”이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얼마 후 한 장례식장에서 마주쳤을 때 닉슨은 “당신은 늘 그렇게 야비하더군”이라고 한마디 했다. 사실은 현직 때도 돌아서면 서로를 ‘정신병자’라고 부르며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비난하던 사이였다.
기질과 관심사에서 비슷했지만 두 사람이 권력으로 가기 위해 택한 길은 달랐다. 닉슨은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이 됐고, 키신저는 최고 지도자의 마음에 들어 참모로 지명됐다. 훗날 운명도 그래서 달랐다. 국민의 뜻을 배반한 닉슨은 권좌에서 물러났고, 여전히 최고 권력자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췄던 키신저는 정권이 바뀌어도 참모로 남았다.
이 책은 닉슨과 키신저를 통해 당시 국제정세와 미국 외교정책 결정 과정을 소상히 알게 되는 즐거움을 준다. 현직 때 그토록 비밀스러웠던 닉슨 행정부가 싱싱한 자료를 통해 까발려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