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로 유혹한 뒤 그 장르를 배신하는 것은, 요즘 작가적 욕망과 상업적 욕심을 동시에 지닌 충무로 젊은 감독들의 한결같은 전략적 선택. 충무로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27일 개봉) 역시 마찬가지다. 공포 혹은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는 이 영화는 관객이 승차하기 전에 들었던 행선지와는 전혀 다른 목적지로 가속페달을 밟는다.

그림형제의 동명(同名) 원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작품은, 숲에서 길을 잃는 주인공을 어른들로 바꿨다. 여자친구 뱃속의 아이 문제로 다투다 시골길에서 교통사고를 낸 은수(천정명)도 그중 하나. 홀리듯 찾아간 숲 속엔 동화에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예쁜 집이 있다. 맏이인 오빠 만복(은원재), 수줍은 소녀 영희(심은경), 철부지 막내 정순(진지희)까지 순진무구한 3남매가 반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따뜻한 환대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숲길을 나가려는데, 몇 시간을 걸어도 제자리다. 탐욕스런 변 집사(박희순) 등 못된 어른들이 거미줄에 불나방 걸리듯 하나 둘 숲 속 집에 끌려오고, 이제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낯빛을 띤 채 어른들을 응징한다. 이 귀여운 아이들의 증오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천진난만함과 포악함을 동시에 지닌 어린 3남매의 비밀은 무엇일까. 원작 동화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은 헨젤과 그레텔이지만, 영화에서 길을 잃는 사람은 어른들이다.

‘헨젤과 그레텔’은 분명 그동안의 한국 영화에서 발견하기 힘들었던 미덕과 새로움을 지녔다. 성장을 멈춘 유년(幼年)의 복수라는 이색적 소재, 여기에 과자로 만든 집으로 상징되는 세트 미술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매혹적이다. 특히 류성희 미술감독(‘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달콤한 인생’ ‘괴물’)이 빚어낸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는, 이 잔혹 동화를 활자가 아니라 스크린에서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푸른 벽지 속에 뛰노는 핑크색 토끼,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난감과 과자, 그리고 외로움과 공포심을 상징하는 다양 다기한 인형들은 버림받은 아이들의 쓸쓸함과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기묘한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임필성 감독 역시 데뷔작 ‘남극일기’보다 한층 더 친절한 화법과 매끄러운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임 감독의 욕심은 티없는 동심(童心)을 훼손하는 어른, 혹은 그런 시대에 대한 영화적 고발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몇몇 집착은 그의 선의와 진심까지도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특히 10대 초반 소년을 상대로 흉기를 사용하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거나, 멍석말이 구타 등 폭력적 학대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일부 잔인한 장면들은 동의하기 어렵다.

‘잔혹 동화’가 그 잔혹성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사회·역사적 맥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유리구두를 신기 위해 발가락을 잘랐던 신데렐라의 언니나, 마녀를 끓는 물에 삶았던 헨젤과 그레텔은 일반 민초(民草)에게 특히 가혹했던 중세 유럽의 현실에 대한 반영이고, 올해 오스카 3관왕을 거머쥔 ‘판의 미로’의 잔혹함 역시 1940년대 스페인 프랑코 시대의 폭압 정치에 대한 영화적 재현이었다. 임 감독은 “요즘 아이들은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채 살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지나친 묘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상황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과연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영화 속 잔인한 장면들이 그런 정도의 사회·역사적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12세 관람가인 이 영화에서.

더구나 호러와 미스터리의 정류장에는 흘깃 눈길만 준 뒤, 어정쩡한 휴머니즘의 종착역에 도착한 이 타협적 여정에 대해, 원래 행선지가 상관없을 만큼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고 관객이 박수를 보낼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