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헌정(憲政)의 최후 수호자' '살아있는 신(神)이자 부처님'….
6500만 명의 태국 국민에게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국왕의 80회 생일(12월5일)을 맞은 이달 태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지난 5일 낮 태국의 방콕 시내 왕궁 주변은 국왕을 상징하는 노란색 물결로 넘쳐났다. 전국에서 올라온 10만여 명의 태국 시민들이 노란색 셔츠를 입고 노란 손수건과 태국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노란색 깃발 등을 흔들며 국왕의 탄신과 그의 무병장수(長壽)를 빌었다.
하루 전인 4일 밤 태국 전역에서는 불꽃놀이와 퍼레이드 같은 경축 행사가 열렸고, 태국 정부는 국왕 탄생을 기념해 2만5000명의 죄수들에게 감형 또는 석방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전국적인 경축 열기 속에서 정작 태국 왕실의 ‘그늘’은 짙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국왕 가운데 세계 최장수 재위 기간(만 61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푸미폰 국왕의 후계자 확정 문제가 아직도 ‘오리무중’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 푸미폰 국왕은 지난 10월 뇌졸중으로 3주간 입원했다가 지난달 퇴원했으나, 혼자 걷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약화한 상태이다.
더욱이 푸미폰 국왕과 시리킷(Sirikit) 왕비 사이에 태어난 4남매(1남3녀) 가운데 누구도 후계자 낙점을 못 받아, 자칫 태국 정국의 불안 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가장 유력한 국왕 승계 ‘0순위’ 후보인 외동아들 마하 바치랄롱껀(Vajiralongkorn·54) 왕세자는 문란한 사생활과 비즈니스 연루 의혹 소문 등으로 방콕 시민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는 게 최대 약점이다.
‘아이리시 타임스’의 키에란 쿠크(Cooke) 기자는 “바치랄롱껀 왕세자는 부인만 세 명이나 되고 바람둥이 같은 결혼 생활을 해 왕실과 사회 지도층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950년 결혼에 골인한 이후 만 57년 동안 시리킷 왕비 한 명에게만 충실하고 여자 문제와 관련해 일절 잡음이나 스캔들이 없었던 푸미폰 국왕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어머니인 시리킷 왕비조차 바치랄롱껀 왕세자를 가리켜 "돈 후안(Don Juan·스페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과 같은 녀석"이라고 혀를 찼을 정도이다.
세간에 팽배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를 씻고 왕위를 물려받고자 바치랄롱껀 왕세자는 최근 예전과 달리 나름대로 변신을 위한 발버둥을 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로 지난 5일 방콕의 태국 왕궁에서 열린 국왕 탄신 축하식장에서 그는 "나는 정직하고 절제하면서 나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한다. 피해야 할 모든 것들을 자제하면서 (왕세자로서) 좁은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공개 충성 맹세를 한 셈이다.
태국 왕실이 공주에게도 왕위 계승 자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도 후계 구도에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유학 중 미국인과 결혼한 장녀 우볼랏(Ubolrat)은 왕실 안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해 후보권에서 사실상 제외된 상태이다.
대신 침착한 성품에 학구적이며 활발한 자선 활동을 벌이고 있는 차녀인 시린턴(Sirindhorn) 공주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공주들 가운데 최고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푸미폰 국왕도 4명의 자녀 가운데 시린턴 공주를 내심 후계자로 가장 선호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하지만 상당수 정치 전문가들은 “시린턴 공주가 쿠데타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남성 위주의 태국 정치판에서 왕실의 권위와 중심을 지키면서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가장 왕위 승계 가능성이 큰 인물은 ‘미우나 고우나’ 바치랄롱껀 왕세자일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문제는 대중적 평판과 사생활이 지금까지 낙제점을 맴돌았던 바치랄롱껀 왕세자가 국왕이 됐을 때, 아버지 푸미폰 국왕에 버금가는 국민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푸미폰 국왕은 재위 기간 중 18번의 쿠데타와 26차례의 총리 교체, 16차례의 헌법 개정이라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 단 세 차례 정치에 개입하면서도 절대적인 정치적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JP모건 체이스의 콘 차티카바니지 전 태국 지사장은 "태국 국민의 국왕에 대한 존경심은 개인 차원을 넘어 제도에 대한 본능적인 숭배 수준"이라며 "그렇지만 세계 최장수 국왕이 물러난다면 태국 정국의 안정적인 관리가 힘들어지고 위기 요인이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