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는 나의 힘?
벼락치기 공부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12월과 함께 시작되는 기말고사와 그에 따른 벼락치기 모드는 고등학생이건 대학생이건 기나긴 겨울방학에 돌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쯤 된다. 또 각 대학의 논술고사를 벼락치기로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은 계절이기도 하다.
벼락치기의 기본은 체력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벼락치기를 위해 체력비축은 필수이다. 졸음은 주적(主敵)이다. ‘잠깐 눈 좀 붙였다가 해야겠다’는 해이한 생각은 곧 난사 당한 성적표로 이어진다. 인터넷, TV, 냉장고, 치킨, 소파 등은 모두 벼락치기를 할 때 멀리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벼락치기의 가장 강력한 적은 따로 있다. 그 적은 12시를 넘어서 1시쯤 되는 시간에 찾아오기 마련인데,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바로 그 정체다. 문득 인생에 있어서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고, 잠 한숨 더 자는 것이 의미 있는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되면 침대로 향하는 자신의 눈길이 무척 정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다음날 아침, 꺼져 있는 자명종과 함께 창밖으로 내동댕이쳐지게 마련이다.
■전제는 나의 힘
주로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연재와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는 수정이는 적어도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전제는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벼락치기를 하다가 문득 좋은 점수를 받으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전제에 대한 공유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전에 가졌던 전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제는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동인(動因)이다. 가령 친구와 3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친구가 3시 5분에 나왔다고 하면 왜 5분 늦었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친구는 자기 시계로는 정확히 3시라는 둥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이런 변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 친구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전제에 대한 공유가 없었다면 친구는 “약속 그 까잇꺼~ 깨라고 있는 거지 뭐~”라고 뻔뻔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5분 늦었네, 정확히 3시에 약속이네”라고 따질 거리가 없어져 버린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분 토론이나 대선 토론 같은 것을 보면 서로 자기네 주장만 하다가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토론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제부터 체크해서 이 부분에 대한 공유를 해야 할 것이다. 약속은 깨라고 있다는 사람과 5분을 다퉈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다. 발전적인 토론, 창조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전제를 찾아내 그것에 대한 공유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