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복자 펠레
어쩌면 겨울은 낭만의 계절일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된 화려한 거리를 여자 친구와 걸으면 선물이 산처럼 쌓인 상점마다 캐럴이 흘러나오고,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이 즐거워 내지르는 환호성이 공원을 가득 채우고, 스키를 타러 리프트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는, 그런 계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겨울은 어떤 사람들에겐, 혹독한 계절이다. 특히 가난한 자에겐 더욱.
여기 아직은 철없는 어린 아들까지 짐처럼 짊어진 늙고 지친 남자가 외국 땅에 일자리를 찾아온다. 불안에 떠는 아들을 안심시키려 허풍도 떨어보지만 삶이란 것이 얼마나 냉정하고 용서라고는 없는 것인지를 잘 아는 그이기에 두렵기는 더하다. 운 좋게 외양간에 허드렛일자리를 얻지만 글씨도 못 읽고 늙어서 말귀도 어두운 그에게 모든 것은 힘들기만 하다.
그리고 겨울이 닥쳐온다. 외양간 귀퉁이에 거처를 마련한 그들의 잠자리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벌어진 문틈과 허름한 이불, 낡아빠진 내복 속으로 혹독한 냉기가 쑤시고 들어온다. 아버지는 추위와 빈곤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아들의 생일선물로 주머니칼을 사준다. 아들은 그 소중한 선물을 약간 모자란 친구를 실컷 때리는 대가로 주고 만다.
강자는 언제나 약자를 괴롭힐 수 있다, 그리고 약자는 그 만행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는 것을 교육시키는 계절, 그것이 겨울이다.
>> 지중해
어느 해 겨울이었을까,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보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약간 어수룩한 이탈리아 병사들이 그리스의 한 섬에 상륙한다. 그런데 섬은 이상하게 텅 비어 있다. 병사들은 약간 당황해 하지만 곧 나름 전쟁분위기를 상기하며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다. 햇살은 온종일 대지위에 작렬하고 공기는 맑고 투명하다.
그들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각자의 취향과 취미에 따라 환경을 만끽한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행복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슬린 커튼과 바닷물 색으로 칠해진 문 사이로 솔솔 스며들어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겁내 몸을 숨겼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행복한데 누굴 해치고 누굴 두려워하겠는가?
음울하게 내려앉은 겨울 하늘과 거리에 얼어붙은 잔설(殘雪)에 지쳐 있던 나는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던 기억이 난다. 대단한 철학이 있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 평화롭고 여유 있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어느 열대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 뜨겁고 나른한 날씨가 너무도 좋았다. 온몸이 땀에 젖는 것도 마다치않고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 도착했을 때의 즐거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더위나 소음에 대한 짜증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그 어떤 ‘결핍감’이 나를 불만족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밤새 불면에 시달리던 나는 일찌감치 숙소를 나와 산보를 했다. 휘적휘적 걷다가 도착한 어느 공원에서 나는 깨달았다. 여름밖에 없는 이 열대의 나라에서 서울에서는 그토록 싫어하던 겨울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그리고 근심과 불안으로 보냈던 그 춥고 긴 겨울 밤들이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즘처럼 햇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풍경이 앙상해지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면 나는 그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햇살이 궁금해진다. 그 이탈리아 군인들처럼 나도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볼 수 있을까 궁리도 해 본다. 그러다가 곧 속으로 중얼거리며 픽 웃고 만다. ‘겨울이 있으니까 여름이 좋은 거지, 잘 알면서!’